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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옹졸 Dec 22. 2024

회계하세요

정산과 성탄절

작은 중창단에 소속되어 있다. 지휘자 반주자 포함 열여섯 명쯤 된다. 노래를 잘 부르는 건 아니고 화음 맞추는 게 재밌다.


나와 반주자가 40대로 나이가 적고 50대, 60대가 주다. 70대도 두 분 있다. 산수를 진짜 못 하는데 가장 어리다는 이유로 작년부터 총무 겸 회계를 맡았다. 주 수입은 달에 만 원씩 내는 회비이고 1년에 서너 번 행사에 서고 받는 사례와 독지가의 후원금이 가끔 있다. 지출은 회식이 많은 부분을 자치하고 지휘자, 반주자에게 명절에만 조금 사례한다. 카카오뱅크 모임통장으로 돈을 관리하고 싶었는데 회원들이 카카오뱅크를 생소해 그렇게 하지 못했다. "카카오뱅크가 뭐시여? 나는 그런 것 안 쓰는디." 그냥 다 똑같다고, 계좌번호 입력하고 은행 이름에서 카카오뱅크만 찾으면 된다고 했어도 몇 어른이 어려워하여 농협 계좌로 했다. 대부분 이체를 하긴 하지만 어쩌다 현금으로 내는 회원도 있다. 회비를 달에 꼬박꼬박 넣는 사람, 일 년 치를 한꺼번에 납입하는 사람, 두어 달마다 넣는 사람 등등. 다양하다. 나는 가끔 회비표를 단톡에 올려 본인 낸 것과 기록이 맞는지 확인하게 한다. 지난 10월 2일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12월 16일, 회비 내역을 올렸다. 24년 정산해야 하니 말일이 되기 전에 미납을 꼭 납부하라고 일렀다. 오순희 회원에게 카톡이 왔다. '선영 씨, 나는 10월에 회비 끝냈어요. 확인해 보세요." 보니, 10월 30일에 9월 분까지 납입했고 나머지는 미납이다. 계좌를 확인했다. 올해 총 세 번, 3월, 5월, 10월에 3만 원씩 입금했다. 연락처에 '오순희'를 입력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반가운 목소리로 받는다. 나도 아주 상냥하게 "선배님, 추운데 어떻게 지내세요?"라고 했다. 괜찮다는 말을 듣고 곧이어 "장부랑 계좌랑 맞춰보니까 아직 3만 원 덜 내셨거든요. 10월 11월 12월이요."라고 말을 이었다. "어, 아닌데. 10월에 회비표에 미납이 세 달이길래 분명히 다 입금했거든." 나는 아니라고, 잘못 아신 거라고, 10월엔 6개월 분만 낸 상태로 빈칸이 세 칸이 아니라 여섯 칸이었다고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단톡방에 10월에 올린 사진이 있다. 상대 목소리에도 힘이 들어가고 점점 커진다. 그쪽도 아니라고 자기는 분명 나머지 세 칸이라 3만 원 내며 완납했다고 생각했다고 본인 틀림없음을 주장한다. 나는 얼른 농협 앱으로 들어가 오순희 회원 입금 내역을 캡처해 카톡으로 보냈다. "선배님, 입금 내역 봐주세요. 착각하신 게 분명합니다."라고 조금 싸늘하게 말했다. "참, 아닌데. 일단 알았어요."라고 말하며 전화를 끊는다. 정수기에서 냉수를 한 컵 받아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 전직 회계, 진중하고 입이 무거워 내가 좋아하는 김인영 회원에게 전화했다.


미간에 인상을 쓰고 나의 답답함을 피력했다. 이미 겪어 본 일인 듯 답이 빠르게 나왔다. "어, 그거 그냥 그대로 결산처리 해 버려요. 회장한테 보고하고요. 특별히 뭐라고 하지 않을 거예요." 모든 증거가 내가 맞지만 사람 관계가 그 걸로만 이루어지는 건 아니기에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오순희 회원에게 다시 전화해 우리 둘 다 실수 있을 가능성이 있으니 그냥 이대로 결산하겠다고 했다. "그래, 알았어요. 그런데 말이야, 정말 세 칸 남았었었어. 그래서 3만 원 입금하고 이번 년은 끝이라고 생각한 걸 내가 똑똑히 기억해." 간간이 웃음을 섞었지만 화가 난 듯 한 목소리였다. 나도 저 밑에서 불이 올라와 증거를 보시라고 말하려다 두었다.


잘 자리에 누웠는데 김인영 회원에 전화가 왔다. "후배, 내가 생각을 해보니까 말이야, 우리가 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잖아. 그러면 더 깊이 생각을 해 보자고, 어떤 게 하나님을 아는 길인지. 내가 해 보니까 아까 말한 방법은 쉽긴 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데는 오래 걸리더라고. 나도 노인이지만 노인들은 절대 자기 생각 안 바꿔. 아무리 논리가 맞고 이런저런 증거가 들이밀어도 소용없을걸. 오순희 회원보다 자기가 살 날이 훨씬 많잖아. 지는 게 이기는 것일 때가 살면서는 많아. 그래서 말인데 한번 져. 이해 안 될 수도 있지. 그런데 진짜 그래.  억지로 하라는 건 아니고 충분히 생각해 본 다음에 수긍되면 해. 그리고 그 메꿔야 할 3만 원은 내가 낼게. 애들 키우는 살림에 3만 원 큰돈이잖아, 나는 요즘 자기보다는 여유가 있어."


지는 건 힘들다. 명백한 실수나 잘못을 시인하는 것도 자존심을 얼마나 구겨야 하는데, 계좌를 두 번 세 번 확인하고 장부를 몇 번이나 맞춰도 내가 맞는데 어느 부분에서 어떻게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가? 그런데 이 어른이 말은 감동스러웠다. 하나님을 더 빨리 아는 지름길이라는 점도 솔깃했다. 그래 뭐 성탄절도 곧 이겠다, 낮고 낮아진 예수님 한번 따라 해보리.


"선배님, 회계입니다."

"어."

"통화 괜찮으세요?"

"어쩐 일이야?"

"혹시 회비를 현금으로 낸 일은 없으세요?"

"글쎄, 그랬던가?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러면 제가 실수했을 가능성이 더 큰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그래. 자네가 틀린 게 확실해. 10월에 보았을 때 분명히 10월, 11, 12월 3칸이 남았었다고. 사과는 받겠네. 나도 자네 수고하는 줄은 알지. 그렇지만 틀린 건 틀린 거야."

"네. 죄송합니다. 들어가세요."


미안하다, 하면 그쪽도 미안하다고 할 줄 알았다. 수그리면 나만큼은 아니라도 조금은 고개를 숙여 줄줄 알았다. 채워 넣어야 하는 돈도 반반쯤으로 하자고 할 줄 알았는데. 그런데 전혀.


김인영 선배가 내게 알려주고 싶은 부분이 이거였을까. 좋은 마음, 또는 내 경우엔 믿음이라고 생각하고 먼저 손을 내민다거나, 마음을 쓸 때가 있다. 그러나 결과는 내가 내는 게 아니라는 것. 형편없고 초라한 성적표를 인정하는 것까지가 믿음이라는 걸 깨달았다. 가만히 있으면 진짜 가마니로 보지만 가끔은 그렇게 해야 하는 때도 있다. 낮고 낮아진 예수님. 우리를 구원할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을까. 예수님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나도 끝까지 싸워 이겼을텐데. 아쉽다.


김인영 선배가 3만 원을 입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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