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요모기 May 02. 2024

사소하다. 세상의 변화에 필요한 좋은 어른의 존재.

클레이 키건 '이처럼 사소한 것들'

오랜만에 방문한 대형 서점. 베스트셀러 코너에 클레이 키건의 책이 높게 쌓여있다. 베스트셀러 도서에 대한 일단의 거부감이 있는 사람이라 흔쾌히 지갑을 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믿을 만한 지인들의 호평이 자꾸 들려온다. 두 번째 서점에 갔을 때는 드디어 책을 들어 이리저리 뒤적여 본다. 그런데 책 뒤표지에 최고의 믿을만한 지인 두 명의 이름이 반짝! 신형철 님과 은유 님이 추천한다니. 나는 더 잴 것도 없이 항복. 즉각 책을 구입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 뿐 아니라 클레이 키건의 다른 책 <맡겨진 소녀>까지.


얆은 책 안에 무슨 대단함이 있을지 궁금해서 읽는 속도는 KTX급. 후루룩 읽는 데 두 시간도 안 걸렸다.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전철 안에서 책을 다 읽어버린 나는 '음... 뭐지..' 약간의 당혹감에 놓인다. 내가 무엇을 놓친 거지.

소설 내용을 요약하자면, 1980년대 아일랜드 소도시, 어느 추운 크리스마스. 생각이 참 많은 펄롱이란 주인공(딸 다섯의 아버지. 아내와 그럭저럭 먹고사는 석탄 목재상)이 수녀원에 감금된 미혼모 어린 여자 아이를 구출해 데려왔다는 이야기이다.  


이 짧은 이야기의 어디에서 지인들이 말한 좋음의 포인트를 찾아내야 하나. 책장을 다시 뒤적거린다. 책 뒤쪽의 옮긴이의 말 중 한 문장에 주목했다. "소설가 존 맥가헌은 좋은 글은 전부 암시이고 나쁜 글은 전부 진술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아, 나는 소설 속의 수많은 비유와 암시를 놓쳤다. 글의 줄거리만 읽었다. 표면만 읽고 내면을 읽어내지 못한 나.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이니 여러 번 읽으라는 옮긴이의 말을 따르기로 한다. 여러 번 읽었다. 그리고 어느 봄밤, 멋진 이들 여닐곱이 줌으로 모여 책 대화를 나눴다. 그 밤이 새도록 말해도 끝나지 않을 만큼 책 안에서 찾아낸 이야깃거리들은 많고도 많았다. 비로소 느껴지는 좋은 글의 향기.


펄롱의 용기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책대화의 밤에도 '어떤 사소함들이 그의 용기 있는 선택을 이끌어 냈나?'라는 질문으로 긴 이야기가 오갔다. 버티며 조용히 엎드린 채 다른 사람들과 척지지 말고 애들 잘 키우며 평화롭게 살자는 아내의 말, 피해를 당하지 않으려면 사나운 개를 혹은 적을 가까이 두고 불의를 보고도 눈 감으며 살라는 이웃사람의 조언을 결국은 따르지 않은 펄롱의 용기.

세상 모든 거대한 변화의 시작점에는 펄롱 같은 이의 작은 용기가 존재한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영웅처럼 여기기 쉽다. 그러나 그들은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 나만큼 주저하고 고민한다. 본인의 결정이 사랑하는 가족에게 미칠 고통을 걱정한다. 약한 존재인 것이다. 두려워하면서도 행동하는 사람과, 행동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나뉠 뿐. 펄롱에게 옳은 일을 향해 나아가도록 이끈 힘의 원천이 무엇일까.


나는 그가 어린 시절에 받은 사랑을 가장 먼저 꼽고 싶다. 어린 펄롱 주변에 있던 든든한 어른들의 존재 말이다. 미혼모의 자식이지만 펄롱이 배 굶지 않고 살 수 있도록 따뜻함을 제공해 준 윌슨 부인의 사랑. 윌슨 부인의 부엌일을 하며 평생을 산 펄롱 어머니의 사랑. 그리고 자신이 아버지임을 숨기고 더 나은 사람이 너의 아버지일 거라 말하며 펄롱의 배경이 되어 준 네드의 사랑. 그 사랑 안에서 펄롱은 안전하게 자랐다.


어린 시절 받은 따뜻함과 지지의 경험은 몸에 밴다. 의식하지 않아도, 거창하게 다짐하지 않아도, 의로움을 보고 자란 이는 의롭게 큰다. 힘든 상황에 놓인 경험이 있고, 그때 누군가 내밀어준 손길 덕에 위로를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은 더욱 그렇다. 그런 위로의 경험이 있는 이는 받은 사랑을 타인에게 나누는 어른으로 성장한다. 우리가 어른으로서 어린아이들을 더 잘 보살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교사로서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환대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사랑은 사랑을 낳는다.


펄롱은 결국 고통스러운 삶을 살던 한 소녀를 구한다. 손을 잡아 준다. 미시즈 윌슨이 펄롱의 어머니와 펄롱에게 그리했듯이 말이다. 맨발의 소녀를 집으로 데려가는 밤, 펄롱은 앞으로 닥쳐올 고생길을 걱정하며 동시에 미시즈 윌슨을 떠올린다.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생각한다. 나는 이 장면에서 어른의 역할을 생각했다. 어른의 사소한 모든 것이 아이들의 몸 안에 기억으로 남는다. 좋은 어른이 아이들을 좋은 어른으로 키우고 좋은 세상으로 나아가게 한다.

좋은 어른이란 역할을 잘 해내고 싶다.


덧붙임. 아일랜드 모자 보호소와 막달레나 세탁소에서 고통받았던 여자들과 아이들의 존재를 알게 해 준 클레이 키건이 고맙습니다. 이 소설 한 편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책들을 생각할 때 사소할지 모르지만, 역사 속에서 그 역할은 거대합니다. 세상에 큰 울림을 남긴 작품과 작가가 정말 고맙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겸손하다. 봄꽃이 보여주는 예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