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드망 Mar 09. 2024

내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항상 숙고하는 것

신경 끄기의 기술 중에서

또 한 분의 어르신을 보내드렸다. 마지막 가시는 길 배웅을 했다. 처음 어르신을 보낼 때는 허탈했다. 몇 번의 경험을 더  했다. 죽음이 항상 우리 앞에 있음을 실감한다. 언젠가는 나도 따라갈 길임을 다시 깨닫는다.


 대학  입학을 하며 기숙사를 들어갔다. 거기서 그 친구를 만났다. 옆 방 친구였던 화학과 아이였다. 무슨 일에든 망설임이 없는 아이였다. 해야겠다 하면 그냥 GO! 였다. 망설이다 제대로 하는 일이 없던 나에게는 너무 멋진 친구였다. 그 아이는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았다.

그 친구는 몸치였다. 그래도 춤출 일이 생기면 무대 위로 뛰어올라갔다. 민망함은 내 몫이었다. 신나게 흔들고 춤추며 그 시간을 즐겼다. 그 친구와 함께였기에 나도 조금씩 용감해져 갔다.


나의 대학 새내기 시절은 그 친구 덕분에 풍성해졌다. 그리고 겨울 방학이 되었다. 갑자기 입원했다는 소식이 왔다. 친구들이 모여 병문안을 가기로 했다. 병문안은 핑계였다. 별일 아니라 생각했다. 모두 다 집이 지방이었다. 입원한 친구를 데리고 나와서 친구들 집을 돌며 놀자는 계획이었다.


친구는 여전히 쾌활한 모습으로 우리를 맞았다. '너, 꾀병이지! 공주 놀이 하냐. 관심받고 싶어 별 짓 다한다' 그냥 퇴원하고 놀러 가자 했다. 친구는 좋아라 했다. 농담과 장난으로 병실을 가득 채운 시간이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친구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었다는 것을! 여름 방학 때 놀러 가자는 친구들의 보챔에도 

못 움직인 이유였다. 우리에게는 알바를 한다고 했었다. 진짜 알바를 하기는 했더란다. 얼마 못 가서 병원 신세가 되어서 방학을 병원에서 보냈다고 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악성 빈혈 진단을 받았단다. 병원에서는 잘 버텨야 4년 정도를 말했다고 했다. 친구의 삶에 대한 열정은 성격이 아니었다. 자기가 살 날의 기한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의 눈을, 말을 의식할 시간도, 여유도 없었던 이유였다. 앞에 놓인 모든 일에 일단 뛰어들어야 했던 이유였다. 죽기 전에 해 보고 싶은 버킷리스트라는 것을 정할 여유도 없었다. 그냥 잡히는 일마다 해 보고 느껴보아야 했다. 그 친구의 삶에 대한 열정에 우리는 함께 동참했다. 그 친구와 함께 더 열심히 놀았다. 더 열심히 삶을 경험하려 몸부림쳤다.


친구의 애타는 마음을 하나님도 아셨을까? 친구는 예정했던 시간보다 10년 가까이를 더 살았다. 중간에 멈추기는 했지만 대학원도 갔다. 직장 생활도 해 보고 싶어 했다. 사장님의 배려로 몸이 아프면 쉬어가며 반년 가까이 직장생활도 해 봤다. 친구가 일이 밀리면 나도 가서 일을 도와주기도 했었다. 그렇게 하얗게 삶을 불태우던 친구는 30을 넘기고 우리 곁을 떠났다. 


결혼을 안 한 처녀는 수의로 노랑 저고리에 빨간 치마를 입힌다고 했다. 동생은 눈물로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그래도 세상을 떠난 언니의 얼굴을 곱게 화장을 했다. 그렇게 곱게 화장한 친구의 얼굴은 처음이었다. 살아생전 보여주지 못한 예쁜 모습을 남기고 친구는 땅에 묻혔다. 지금도 가끔 친구는 꿈에 나온다. 항상 어딘가에 살아 있었다는 설정이다. 꿈에서 미친 듯이 화를 낸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살아 있으면서 그동안 연락이 없었냐고 울고 불고 하다 잠이 깬다. 


그때부터였다, 죽음이 항상 우리 앞에 있는 존재임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도 세월에 이길 힘이 없었다. 사는 것이 녹록지 않았다. 어느 틈에 항상 느끼던 나도 죽을 존재라는 의식을 잃어갔다. 그냥 버티며 살아내야 하는 삶을 살았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러려니 했다. 내가 10년을 모셨지만 어찌 보면 이미 예정된 일이었기 때문일 거다. 그러다 요양원 일을 하며 어르신들의 죽음을 경험하고 있다. 


내가 기저귀를 갈고, 밥을 떠먹이던 어르신이 돌아가셨다. 텅 빈 침대를 보며 삶이 얼마나 허망한가를 느낀다. 우리 앞에 죽음이 언제나 기다리고 있음을 다시 깨닫는다. 그분에게도 꿈이 있었을 거다. 하고 싶었던 일도 있었을 거다. 그러나 어느 틈에 노년이 되었을 거다. 더 이상 당신 뜻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몸이 되었을 거다. 

삶의 모든 것이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모래처럼 흘러 버렸을 거다. 


신경 끄기의 기술을 읽었다. 작가는 20대의 나이에 겪었던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이야기한다. 나도 언젠가는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뼈로 깨달은 것이다. 작가의 삶은 죽음을 항상 숙고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나도 젊은 나이에 친구의 죽음을 겪었다. 그리고 이제는 자주 노년의 죽음을 겪고 있다. 죽음이 항상 내 곁에 있음을 항상 깨닫는 삶을 살고 있다. 어찌 보면 축복의 시간이다. 한시도 흐트러질 수도 없다. 느슨해질 수도 없다. 자주 죽음을 목도하며 사는 삶은 나를 깨운다.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목적을 다그친다.


매 순간을 내 삶에 최선을 다 하는 삶을 살려한다. 나도 언젠가는 죽을 존재이기에 이 시간이 소중하다. 어쩌면 내가 하는 일들이 시간 낭비일 수도 있다. 나의 버킷리스트가 의미 없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일이다. 아직은 내가 살아 숨 쉬고 움직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다. 죽음을 만나는 날이 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테니까!

작가의 이전글 3, 6, 9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