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은 했지만 탈출구는 없었다
'행복했던 고통의 날들'
내가 입학한 요리전문학교는 학생들 대부분이 이민을 목표로 1~2년 단기코스를 밟아 취업을 목적으로 하는 학교였다. 그렇기 때문에 영어를 사용한다는 것 말고는 적응에 크게 어려움이 없었다.
같은 클래스 친구들도 한국인, 중국인, 베트남, 인도, 스리랑카 등 대부분이 아시안이었기 때문에 함께 어울리거나 섞이는데 큰 이질감이 없었다.
그나마 고전했던 것은 능숙하지 못한 요리솜씨였다. 음식이라고는 떡볶이와 라면 말고는 만들어 본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요리사라니..
나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느 정도 주방이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칼 질부터 식재료 선별 그리고 음식의 순서까지 모든 것이 나보다 우월해 보였다.
그렇게 첫 학기는 매번 옆에 필리핀 짝꿍에게 매번 도움을 요청했다.
"help me"
나는 시험을 볼 때마다 반에서 필기 1등, 실기 꼴등이라는 진기록을 세우며 합산 중간 성적으로 패스를 했다. 주입식 교육에 최적화된 30년 짬밥의 코리안이었기 때문에 수업을 들으면서
어떤 게 시험문제이고 뭘 외워야 하는지가 뻔히 보였다. 시험 전에 요약지를 만들어서 친구들에게 도움을 주었고, 대신에 실기 시간에는 반대로 도움을 받았다. 나의 요리 실력은 제대로 된 주방 안에서는 정말 가관이었다. 종종 생선을 도륙 내버리거나 빵을 태워버렸고 학기 중간이 지나도록 교수님한테 제대로 칭찬 한번 들은 적이 없었다. 손가락은 항상 칼에 베이거나 오븐에 데어서 물집 아니면 반창고를 상비하고 다녀야 할 정도였다.
그렇지만 ,
'내 마음엔 밝은 희망이 충만했다'
함께 수업받는 사람들과의 우정도..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시행착오들도..
이 모든 것이 '행복으로 가는 여정'의 한 발자국으로 느껴졌다.
그때 느꼈다.
사람의 감정을 좌우하는 건 환경이 아니라 마음에 있다는 것을..
어떤 환경에서든 생각을 바꿔 그것을 받아들이면 즐거움이 마음에 자리 잡게 되고 행복해지게 되어 있다는 것을..
물론 이런 교훈을 외국에 나와서 이색도전을 해야만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깨우치는 시기는 각자에게 맞춰진 알람시계가 따로 정해져 있는 것 같다.
한국에서도 내가 30년을 살아오면서 크고 작은 시련들은 자주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시련에 대비한 경각심을 고취하는 것에만 몰입하며 행복을 일 깨우는 것을 배우는 것과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너무 잘하려고 했던 것을 내려놓으니 신기하게도 그게 가능해졌다.
'힘을 빼야 인생이 좀 더 자연스럽게 흘러가는구나'
그렇다.. 나는 그전까지는 힘을 빼는 방법을 모르고 살았다. 아니, 힘을 빼면 인생이 망한다고 생각했다. 항상 최선을 다하고 열정을 불태우서 온 힘을 다해야만 한 걸음씩 목표를 향해 다가간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었다.
하지만, 그냥 힘 빼고 걸어가도 걸어가지고 어차피 비슷한 목적지에서 결국 만난다는 사실을 이곳에서 새로운 공부를 하며 배워가고 있었다.
요즘 어린이집 다니는 딸아이의 한글 공부를 도와줄 때 보면 연필 쥐는 방법을 몰라서 온 힘을 다해 꽉 쥐고 한 글자 한 글자 최선을 다해 쓰는 딸내미의 모습이 애처로우면서도 귀엽다. 때로는 종이가 찢어지기도 하고 연필심이 부러지기도 한다.. 그래서 이렇게 말해주었다.
"조금 힘을 빼고 연필을 잡아봐. 그러면 더 잘 써질 거야"
내가 너무 늦게 깨달은 행복에 가까운 지름길을 딸내미는 조금 빨리 알았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 요즘이다.
어찌 됐던 즐거운 마음으로 학교생활은 했었지만 현실에서 돈을 버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였다.
뉴질랜드의 물가는 한국보다 훨씬 비쌌다. 특히 월세가 아닌 주세로 내는 렌트비용은 일주일에 20만 원 정도의 가격이었고 한 달이면 80만 원이었다.
거기에 음식 물가도 저렴한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별 다른 소비를 하지 않아도 한 달에 그냥 나가는 돈이 족히 150만 원은 됐었다. 처음 두 달 정도 마냥 즐기고 쉬다 보니 가지고 온 돈의 잔고가 금방 바닥이 나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라는 생각에 학교를 다니면서 파트타임으로 일 할 수 있는 곳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보통 생활비 때문이 아니더라도 나중에 정규직 취업을 위해 파트타임 경력과 레퍼런스를 만들어놓으려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파트타임으로 일을 했다.
문제는 아직 요리학교에 다니는 초짜를 그것도 외국인인 나를 받아주는 현지 식당주인이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는 한국인 사장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일하는 것뿐이었다. 모든 한인식당 사장님들이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한인식당 사장들은 정당한 페이를 주지 않고 세금을 탈세하고 최저시급 이하의 돈을 주며 워킹홀리데이로 온 대학생 혹은 나 같이 요리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을 염가에 고용하고 있었다. 나 역시도 한 달에 200만 원씩 적자가 나지 않으려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내가 처음 면접을 보고 일하게 된 곳은 오클랜드 시내에 있는 중국집이었다. 해외에 나가서 살다 보면 김치 다음으로 그리운 것이 바로 이 짜장면이다. 특히 이런 중식당은 몇 군데 없기 때문에 평일에도 꽤 많은 손님들이 찾아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주방일 중에서도 중식은 기름이 많고 불과 기름을 쓰는 일이 대부분이라 주방에서도 높은 난이도라고 한다. 이런 사실도 모른 채 호기롭게 중식당 주방에 졸병으로 들어가서 하게 된 첫 미션은 짬뽕에 넣을 홍합을 씻겨내고 까는 일이었다. 홍합 사이에 돈가스 칼을 넣어서 홍합을 벌리고 그 바깥에 붙어있는 석회 찌꺼기와 조개를 다 손으로 벗겨내야 했다.
주방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정말 급박하게 돌아가는 곳이었다. 주문이 밀리면 주방 안에 사람들은 예민해지고 흥분하며 고성이 오고 갔다. 지쳐서 쉴 틈도 없고 상처받을 여유조차 없는 현장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기계처럼 홍합을 벗겨내고 까는 일이었다.
요령이 없어서일까? 홍합을 몇 포대 까고 나면 항상 손가락이 엉망이 되었다. 하루에 한 번 이상은 손이 베어서 피가 흘렀다. 하지만, 계속 물과 음식을 만져야 하기 때문에 한가하게 대일밴드를 다시 붙이고 떼고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홍합을 다 까고 나면 다음으로 해야 하는 일은 통으로 된 단무지를 최대한 얇게 많이 썰어놓는 일이었다. 칼질이 서툴렀던 나는 얇게도.. 빠르게도 썰지 못했다. 심지어 손가락 피는 계속 지혈이 안되어 단무지에 묻을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뒤통수에 따가운 고성이 박히곤 했다.
정말 그럴 때면 눈물이 핑 돌정도로 서러운 기분마저 들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피크타임이 끝나고 손님들이 가면 산더미처럼 쌓인 설거지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나마 마무리를 할 때 설거지를 하는 시간이 가장 마음이 편했었던 것 같다.
마감을 하고 족히 1미터는 되어 보이는 음식물 쓰레기통을 처리하고 나면 드디어 나의 하루업무가 끝나게 된다. 그리고 그 시간이 돼서야 겨우 허리 한 번을 여유 있게 폈는데 그럴 때마다 허리에서 우두둑하고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났었다.
그때 허리를 펴고 바라본 뉴질랜드의 하늘은 내가 동대문 지점에서 은행 퇴근길에 봤던 하늘과 크게 다른 느낌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하루 종일 한국 사람들이 짜장면 먹는 것만 보다가 이 시간에 옆에 외국인들을 보고 있자면 다시금 내가 지구 반대편에 와있는 현실을 자각하게 된다.
"아. 여기 뉴질랜드 맞는구나"
더 아이러니한 건 이렇게 부당한 시급과 노동을 하고도 나는 잘렸다. 이유는 나보다 체력 좋고 손도 빠른 젊은 워킹홀리데이 친구들이 널리고 널렸기 때문이다.
호된 신고식을 치르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급여로 받은 뉴질랜드 100달러짜리 몇 장을 손에 구겨 쥐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좇던 행복은 한 낱 허울 좋은 신기루였던 건가...?"
퇴사를 하고 3개월 만에 처음으로 회사생활이 다시 생각났다. 죽을 만큼 싫었던 한국에서의 회사생활이 생각나는 거에 스스로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하면 진짜 난 아무것도 아닌 놈이 되는 거였다.
그런 순간들을 마주하게 되자 퇴사하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후회는 대체로 비겁한 순간에 찾아온다.
지금이 나의 최선이란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때..
지금을 해결하기보다는 쉽게 과거를 후회하는 쪽을 선택한다.
"탈출은 할 수 있어도 탈출구는 따로 없구나.. 난 그냥 현실에서 도망친 거였어.."
진실을 토로한다. 나는 센척했었지만 그냥 비겁한거였다. 하지만 늦더라도 진실은 마주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기에 지금에라도 고백한다.
비겁함을 고백하는 사람은 적어도 그 순간부터는 비겁하진 않은 거니까...
하지만, 당시에 나에게는 좌절과 포기를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없었다. 그리고 정신 차리고 앞을 보니 이제는 대안이 없는 것이 최후의 대안이 되어버린 막다른 골목길에 서 있었다.
주방 안에서 내가 가질 수 있는 경쟁력은 아무것도 없었다..
요리 쪽에는 재능도 능력도 특출 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가진 경쟁력은 오로지 태도 밖에 없었다. 내가 살아온 삶은 꽃길이 아니었기에 할 수 있는 것도.. 할 줄 아는 것도 이것뿐이었다. 다행히 이 하나뿐인 승부수는 한국사장들에게 통했다. 훨씬 더 일찍 가서 더 많은 일을 해주고 더 늦게 나오는 그런 모습으로 어필해야만 나의 부족한 요리 실력을 상쇄시킬 수 있었다.
그 중국집 이후로도 학교를 다니면서 계속 주방 경력을 쌓아나갔다. 여전히 현지 식당에서의 기회는 제한적이었기에 나는 말로만 듣던 악명 높은 이민 1세대 한인 사장들의 매운맛을 온몸으로 경험하며 주방에서 경력을 쌓아나갔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경력을 쌓을 기회도.. 줄어드는 통장의 잔고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국 유명연예인의 부모님이 하는 고기뷔페에서 철판을 담당했던 일..
삼성전자 출신 사장님이 운영하는 초밥집에서 닭고기 해체와 김밥을 쌌던 일..
신라호텔 주방장 출신이라는 사장님이 운영하는 일식집에서 일식 요리를 배운 일..
그 시간 동안 부당한 일도 참 많이 겪었다.. 반면에 지구반대편 작은 주방 안에서 '사람'과 '인내'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그렇게 1년 반이라는 세월을 학교와 주방에서 보내면서 마침내 나는 요리 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그 당시를 다시 회상해 보자면, 나는 '행복한 고통의 날들'이었다고 표현하고 싶다.
육체적으로는 정말 힘들었다. 마치 몸이 가루가 돼서 사라질 것만 같은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고통이 만들어내는 추억들이란게 있다. 그리고 이제는 그것마저도 내게는 행복의 한 조각이다. 그 고통을 행복으로 기억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마도 내가 감정의 조미료를 사용하는 법을 체득했기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2년 전에 뉴질랜드를 처음 왔을 때 보다는 확실히 키가 한 뼘이상 자란 '성장한 어른'이 되어 있었다.
'스스로 태우지 않고 빛나는 별은 세상에 없다'
빛나고 싶다면 스스로 태워야만 한다는 진리를,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은 빨리 깨닫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