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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뱅대리 Apr 14. 2024

미스터 초밥왕의 '행운'

'내 인생에 부전승은 없었다'

졸업을 하는 순간부터 마음이 급해졌다. 대부분의 요리학교 학생들은 졸업하자마자 경력의 연속성과 영주권 취득을 위해 기존에 파트타임으로 일했던 곳에서 비자를 받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나는 졸업 후만큼은 한인 사장이 아닌 현지 식당에서 일을 해보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그래서 조급함을 잠시 미뤄두고 수많은 현지 식당에 이력서를 제출했다. 몇 번은 면접까지도 갔었지만 아쉽게도 키위(뉴질랜드 현지인)들이 하는 레스토랑과는 끝내 연이 닿지 않았다. 졸업장을 얻으면 1년이라는 기간 동안 구직을 할 수 있는 비자가 주어졌지만 계속 이렇게 취준생으로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에 내가 타협을 하게 된 곳은 일본인이 운영하는 레스토랑이었다. 스무 명 정도 되는 일본인들이 일하는 꽤 규모가 큰 음식점이었고 기존에 일했던 한인식당보다도 훨씬 나은 조건을 제시해 주었다. 영어권 국가에 와서 양식을 전공하고 일식 셰프로 취직한 것이 조금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외국인들과 일할 수 있는 환경이기도 했고 기존에 내가 생각하는 일본인들은 계산이 정확할 거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비자나 돈 문제로 나의 뒤통수를 때리지는 않을 거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스스로와의 타협을 끝내고 마침내 나는 이곳을 선택하게 되었다.


"이라쌰이마세~ 오갸끄사마데~"

나의 하루는 이랴쌰이마세로 시작해서 이라쌰이마세로 끝났다. 고객이 입장을 할 때마다 북을 치며 저 말을 외치는 것이 나의 주 요 임무였기 때문이다. 물론 북을 치는 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오픈 주방에서 초밥을 만드는 담당을 하며 고객들에게 최대한 일본 현지 분위기를 낼 수 있는 의상과 도구를 사용하며 응대를 했다. 여직원들은 일본 전통의상을 입고 서빙을 하며, 나는 마치 일본에서 건너온 프로 초밥러 느낌을 풍기는 옷을 입고 큰 북을 울리면서 토치를 이용해 초밥을 만들었다.

일본 사람들과는 함께 일하면서 배운 점이 참 많았다. 6개월 넘게 일하면서 봤었던 일본인들 중에 그 누구도 요령을 피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정말 일하는 시간 동안만큼은 모두가 그 가계 주인인 것처럼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중간중간 쳐다볼 법도 한데 일하는 시간 동안 어떤 누구도 휴대폰을 쳐다보는 일도 없었다.

내 인생 통틀어 군대 다음으로 이렇게 각 잡힌 규율 속에서 일사 분란하게 조직이 돌아가는 것을 본 건 처음이었다. 심지어 누군가가 강압하거나 훈계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간혹 지금도 일본으로 여행을 가면 열차를 운행하는 분들이나 숙소를 안내해 주시는 분들의 친절함에 감동받을 때가 많다. 나도 이때 일본사람들과 일을 하면서 이게 일본인들의 성실한 DNA인 건가 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초밥에 밥알이 몇 개고? 280개다 명심해라!"

최근 인기 있는 드라마에 나왔던 대사를 보면서 내가 초밥을 배울 당시의 생각이 많이 났었다. 내 사수는 사시미 담당  할아버지 히로키상 이었는데 그분은 처음 나를 보고 악수를 건내었을 때 말했다.

"손이 차네.. 합격!"

처음에는 무슨 의미인지도 몰랐는데 초밥은 콜드푸드이기 때문에 열이 전달되면 재료자체의 맛이  쉽게 변하는 음식이라 초밥 담당자는 손이 찬 게 좋다는 뜻이었다.

'혈액순환이 잘 안돼서 손발이 찬 태음인일 뿐인데... 이런 걸로 칭찬을 받네 ㅋ "

나는 하루에 6시간 이상을 초밥을 만들면서 어느새 북 치면서 초밥을 만드는 그 동네의 미스터 초밥왕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일본 사람들은 그 에 한 명뿐인 한국인을 특별하게 대하지도 차별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내가 가진 경력과 실력에 맞는 정당한 세금신고와 급여를 지급해 주었다. 장사가 엄청 잘 돼서 몸이 고되긴 했지만 이곳에서 일한 건 잘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내가  함께 섞여 있을 때는 일본어 대신 영어를 사용해 주었다. 그 마음이 고마워서 나도 일본어 공부를 자투리 시간에 하게 되었고 낮은 등급이긴 하지만 거기서 일하는 동안 JLPT자격증도 취득했다. 그렇게 반년정도 지나면서 말하는 건 서툴러도 일본 사람들의 대화를 따라갈 수 있는 수준까지 일본어 실력이 올라왔다. 가끔 영어권 국가에 와서 일본어만 늘고 있는 이 아이러니함에 현타가 올 때도 있었다. 지금도 남들은 외국에서 몇 년을 살다가 왔으니 영어가 원어민 수준인 거 아니냐며 남의 속도 모르고 물을 때가 있지만 그럴 때마다 내가 혼자서 멋쩍은 웃음을 짓는 진짜 이유이기도 하다.


영어뿐만이 아니었다. 방 한 칸에 살면서 화장실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공간에서 1년 가까이를 지냈던 우리는, 원래 우리가 상상했었던 외국스러운 삶에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내가 벌어오는 주급으로는 원룸 집세에 휴대폰 요금 그리고 어쩌다 먹는 짜장면 한 그릇 정도가 우리가 부릴 수 있는 최대 사치였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나야 그렇다 하더라도 아내에게는 외국의 좋은 집 그리고 좋은 환경에서 살아볼 수 있게끔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런 아쉬움을 가지고 있던 중에 도전하게 된 것이 오페어(가정돌보미)였다. 오페어란 아이를 돌보면서 그 집에 거주하고 숙식과 일정 급여를 지급받 는 직업이었다. 와이프가 취업한 집은 부유한 중국인 가정이었다. 그리고 바다가 보이는 2층 대저택에서 외국인 가족과 함께 살며 돈도 벌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동시에 나는 근처에 있는 민박집의 차고 옆 반지하방으로 이사를 갔다. 그 집의 렌트비용은 엄청 저렴했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둘이 함께 주말에 여행도 가고 저금도 조금씩 할 수 있을 만큼의 여력이 가능해졌다. 함께 생활하지 못하는 생이별 같은 구조였지만 이렇게 독하게 하지 않으면 이도 저도 되지 않는 상황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 계획을 강행했다.

정말 감사하게도  중국인 부부는 우리의 상황을 이해하고 많은 배려를 해주었다. 좋은 곳에도 함께 데려가주고 항상 식사 자리 나 가족 모임에 나를 초대해 주었다. 그 중국인 가족은 나중에 헤어지는 순간까지도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모든 배려를 다 해주었다.

'중국인들은 시끄럽고 매너가 없다'라는 선입견이 강했었는데 이때 함께한 시간들 덕분에 중국인들의 계산 없고 정스러운 모습에 크게 매료되었다.


정확하고 성실한 일본인! 계산적이지 않고 정스러운 중국인!

뉴질랜드에서 펼쳐진 '한중일 삼국지 라이프'는 생각보다 재미있고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이대로 조금만 더 버티면 우리가 원하는 영주권을 취득하고 그  후에는 우리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겠다는 희망과 안정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겨우 자리를 잡을 무렵.. 우리의 뉴질랜드 인생에 큰 지각변동이 생겼다.

하나는 이민정책의 변화로 오클랜드가 아닌 지방 소도시에 가서 일을 하지 않으면 영주권을 취득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또 다른 하나는 우리 사이에 아이가 생겼다.

'이제 겨우 안정되었는데 직장도 옮기고 이사도 가야 한다고? 그리고 내가... 아빠가 된다고...??

정말 중요한 순간에 우리에게 닥친 큰 변화들이었다.


... 생각해 보면 나는 인생을 살면서 공짜로 주어진 '부전승' 같은 행운이 별로 없었다. 우연히 경품에 당첨된 적도.. 남들에게는 어쩌다 찾아오는 뜻밖의 작은 행운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언제부터인가 더 이상 행운을 좇지 않기 시작했다. 행운을 좇다 보면 실망하고 실망하다 보면 좌절했던 경험들이 여러 번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일어난 행운을 바라보며 부러워하던 내 모습도 싫었다

그래서 이런 우연을 가장한 시련이 찾아올 때마다 스스로 최면을 걸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부전승이 기본값이라면 나는 예선전이 기본값이야'

'그래 나는 예선전부터 이겨나가면 되는 거야. 그래 봐야 남들보다 한 발 더 뛰면 되는 거지 내가 운이 없는 건 아냐'

그래서인지 남들로부터 보여지는 '행운'이라는 단어도 이제는 내게 그저 막연한 활자에 불과하다

반면에 나는 행운 대신 기회를 좇는 것에 집중한다. 기회를 좇아 노력을 다해야 남들만큼의 결과를 거머쥘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최대한 많은 기회를 잡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그때나 지금이나 망설일 시간에 나는 묵묵히 도전할 수 있는 기회에 집중한다.


당시에도 겨우 안정감을 느낄 때쯤 이민정책이 바뀐 것 때문에 좌절했었고, 불안정한 시기에 아이가 생겨서 너무 두려웠었다. 하지만! 그 후로 7년이 지난 지금의 결과를 보면, 그 당시 나에게 시련이라고 생각했던 사건들은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었다. 그때 그런 파고가 내 인생에 없었더라면 지금 내 옆에 있는 내 인생 최고의 보물인 우리 딸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또 하나를 배웠다.

'어떤 일은 불행을 가장한 행운으로 다가오기도 한다는 것을..'


행운과 행복은 비슷하게 느껴지지만 본질적으로 다르다.

행운이 따르지 않은다고 해서 행복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혹시라도 본인이 평소에 운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먼저 그런 인생을 살아온 사람으로서 이 말을 전해주고 싶다.

"불확실한 행운에 기대지 말고 확실한 기회를 좇으세요! 그러다 보면 행복이 저절로 따라올 겁니다"


"행복의 문은 한쪽이 닫히면 다른 쪽이 열리는 법이다. 그러나 우리는 닫힌문만 오랫동안 보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열려있는 다른 문을 보지 못한다 "
                                                                                                                                                                                                                   -헬렌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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