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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뱅대리 Apr 21. 2024

뉴질랜드에서 만난 '파랑새'

'행복의 필수 조건 = 일상의 즐거움'

이제는 아내뿐만 아니라 배 속에 아이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나더더욱 두려운 마음을 들킬 수 없었다..

무섭고 무거운 책임감이 느껴졌다...

내 인생을 뒤돌아보면 이런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들이 꽤나 많았던 것 같다. 어릴 때부터 집안의 장남이면서 밑으로 동생들만 있었기 때문에 나는 언제나 첫 째였다.

그래서 나는 필연적으로 이런 훈련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8살 때도.. 5살 때도.. 나는 동생들을 이끄는 '골목대장의 사명감'으로 어떤 상황이 닥쳐도 동생들 앞에서 무서운 감정을  내색하지 않았다.

어린아이들은 길을 잃었을 때 형이 울어버리면 마치 도미노처럼 무너져 버리며 모두 다 같이 울게 되기 때문이다. 경험을 어렸을 적부터 해왔기 때문에 아마도 본능적으로 내 몸이 기억하는 습관이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인생을 살면서 두려운 마음이 들 때도  힘든 상황이 닥쳐도.. 이 숙련된 책임감은 나에게 큰 무기가 되어 주었다.

그래서 책임이란 나에게 '무겁지만 귀한 짐'이다.

'두려움'이란 감정에 대해 지금까지 스스로 깨닫고 실천하고 있는 것이 한 가지 있다. 바로 내 마음속 두려움을 설렘으로 전환시키려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그 과정 속에서 찾아오는 두려움이 용기와 자신감이라는 인생의 연료로 변모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연료를 가지고 있는 덕분에 나는 른 사람들보다 '비를 맞으며 달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한 가지 더 '두려움'에 대한 나의 생각을 말하자면, 나는'두려움도 하나의 습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습관이 생기는 것 또한 매우 경계한다..

런 내가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 선적으로 하는 일은 '두려움을 규정하는 일'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너무 당황스러운 건 사실이지만 내가 느끼고 있는 두려움이 무엇인지를 먼저 파악해 보자"

첫 번째, 나는 지금 당장 이직을 해야 한다. 그리고 뉴질랜드의 어딘지 모를 시골 마을로 이사를 가야 한다.

두 번째, 10개월 뒤에는 아이가 태어난다. 출산도 육아도 앞으로의 일이 너무 막막하다..

우리에게는 정말 심각한 사안이었지만 두려움이란 감정을 느끼는 것 자체가 지금의 나에게는 너무 큰 사치였다. 머리로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당장 구인광고를 찾아 지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더 작은 도시의 가계를  당장 찾아야만 했다. 다행히 운 좋게 급여조건과 업무시간 그리고 비자를 내가 원하는 대로 지원해 주겠다는 사장님을 바로 찾게 되었다. 그 사장님은 이민 2세대로 작은 시골동네에서 초밥 가게를 운영하는 분이었다. 아마도 너무 시골이어서 사람을 구하는 것이 어렵다 보니 그분도 오래 일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었는데 마침 자리가 공석이었던 것이다. 서로의 니즈가 맞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결정을 한 뒤 기존에 직장과 집을 최대한 빨리 정리했다.. 그렇게 2년 동안 정들었던 오클랜드를 떠나 정말 영화에서나 볼법한 시골 동네 '다가빌'이라는 소도시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뉴질랜드 북쪽에 위치한 이 다가빌이라는 동네에는 한인 가족이 우리를 포함하여 세 가정밖에 없었다. 한국인이 거의 없는 동네여서 그런지 그때부터가 진짜 외국에 온 기분이었다. 새로운 주방에서 일을 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이제 나름 2년 경력자라서 돌아가는 상황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숨 쉴틈도 없이 일했던 기존의 직장들에 비하면 오히려 여유가 있을 정도였다.  일 뿐만이 아니라 생활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8시에 출근해서 4시에 퇴근하는 스케줄 덕분에  퇴근해서 집에 가면 아직도 오후 4시 반밖에 되지 않았다.

주말을 위해 평일을 희생하던 한국에서의 삶과 는 다르게 평일도 여유가 있는 진정한 주 7일의 삶을 누리게 되었다.

'평일도 소중한 내 인생의 한 부분인데.. 왜 주말만 편애하며 살았지..'

진작에 이런 환경으로 옮길 생각을 못했을까 생각을 했었다.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그날의 저녁거리를 함께 장 보며 저녁식사를 마쳐도 6시가 채 되지 않았다.

내가 한국에서 그토록 바랬던 ' 저녁이 있는 삶'이 비로소 이곳에 와서 가능해진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동네 자체가 차를 타고 10분만 나가도 멋진 바다와 석양을 볼 수 있는 멋진 자연환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하늘과 바다의 똑같은 색감을 보면서 아무 생각 없이 현실과 동 떨어져 있는 느낌을 받다 보면 다시 현실세상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충전되기도 했다.

이런 생활이 익숙해지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항상 자극적이고 역동적인 삶을 통해 '살아있음'을 느꼈었던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멈춰있는 것들에 더 시선이 가기 시작했다. 그동안은 전혀 관심 없었던 풀 한 포기와 나무 한그루에도 감동을 느끼기 시작하는 내 안의 낯선 감수성을 보게 되었다.

돗자리 하나와 간식거리를 챙겨서 매일 저녁 해변가 앞의 모래를 밟고, 지는 노을을 보며 하루를 마무리하고는 했다.

정말 매일매일이 햇살 따듯한 '즐거운 소풍 같은 날들'이었다.

이름 모를 어느 바다에서 석양을 바라보던 그 순간... 나는 행복에 가장 근접한 사람이었다.


비단 자연환경뿐만이 아니라 그곳에서 펼쳐진 시골 라이프는 여러모로 풍족했다. 오클랜드와는 다르게 정말 작은 동네였던 다가빌에서는 이웃 사람들과도 교류할 기회가 많았다. 옆 집아저씨는 농사지은 고구마를 가져다주기도 했고, 같은 교회 아주머니는 직접 낚시해 온 생선요리를 먹어보라고 가져다주기도 했다. 그곳에서 만난 동네 사람들은 평일에도 함께 저녁식사를 제안하기도 했고, 우리의 영어실력  향상을 위해 스스로 대화 상대를 자처해 주기도 했다.

정말 대가 없이 우리에게 베풀어주는 그야말로 '따듯한 온정'이었다.

한국에서도 어릴 적 이후로는 경험해보지 못했던 가슴 따듯해지는 이웃사촌 간의 정을 만리타국에서 느끼며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보냈다.

풍요롭지는 않지만 모자랄 것 없었던 그때의 시간 자본주의에 쪄들어 그동안 잊고 살았던 인생의 중요한 '행복 한 조각'을 되찾았은 것 같았다.

그저 숨 쉬듯 자연스럽게 되는대로 즐겁게 살다 보니 어느덧 나는  근심과 걱정을 몇 스푼 덜어낸 가벼운 사람이 되어있었다.  경직된  나의 삶이 스무 살 이후 처음으로 말랑말랑해진 것이다.

군 제대 이후 숨 가쁘게 달려왔던 지난 10년의 시간을 돌이켜 보면, 아마도  가장 마음 편히 보낸 시간들이지 않았나 싶다.

막연하게 행복하고 싶어 떠난다라고 외쳐댔지만 구체적으로 그게 뭔지 설명하기 힘들었었다. 하지만, 이때 보낸 시간들을 기점으로 행복의 정의를 내릴 수 있게 되었다.

뉴질랜드 시골동네에서 보낸 시간들을 통하여 내가 알게 된 행복의 필수조건은 '일상의 즐거움'이었다.


그렇게 멈춰진 것 같았던 우리들의 시간은 흘러갔고 아내도 어느덧 임신 8개월 차에 접어들었다.

이제 슬슬 출산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 다가왔다. 문제는 우리가 병원까지 2시간을 차로 이동해야 하거나 응급 시에는 헬리콥터를 타고 병원으로 이동해야 하는 지구 반대편 시골동네에 살고 있다는 점이었다. 출산과 그 이후의 일에 대해 현실적인 고민이 깊어졌다. 병원에 가서 의사들의 의학용어를 알아들을 자신도 없었고 정말 긴급한 상황이 되었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가족 한 명이 없다는 것이 아내와 나에게는 큰 불안요소였다. 한국에 계신 부모님을 모셔올까도 생각했지만 그 마저도 상황이 우리 생각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런 고민은 , 그냥 부딪히고 버티고 이겨냈었던 지금까지의 상황과는 아예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결국, 아내는 고심 끝에 한국으로 가서 출산과 산후조리를 받기로 결심했다. 나도 그렇게 하는 것이 마음이 편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되면 내가 함께 갈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이미 영주권에 필요한 영어점수와 학력 그리고 경력과 비자까지 모든 준비가 끝난 상황이었기 때문에 앞으로 이곳에서 1~2년이라는 시간만 더 버티면 영주권 취득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때 주변에서는 모두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신생아 때는 아빠가 필요 없어. 그리고 기억도 못해"

"몇 년 떨어져 있으면서 여기서 그냥 있어. 아깝잖아.."

하지만, 그렇게 나 혼자 이곳에서 몇 년을 더 준비해서 설령 영주권을 취득하게 되더라도.. 그것은 내가 찾던 행복의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시간을 함께 있지 못했던 것을 평생 후회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정말 많이 고민을 했다... 어쩌면 내가 인생을 살면서 가장 내리기 힘들었던 결정 중 하나였던 것 같다.

그리고 오랜 시간 고민 끝에 마침내 나는 결정했다.


내가 생각했었던 행복한 가정의 모습과 영주권 취득이라는 큰 성취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면..

나는 그 성공의 뒷모습을 배웅하며 행복한 가정의 모습을 보는 쪽에 서 있기로..


그렇게 우리만의 파랑새를 찾아 지구 반대편까지 왔었던 우리의 도전은... '출산'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며 막을 내리게 되었다...


... 이미 시간이 훌쩍 지나 딸아이는 지금 7살이 되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했던 것처럼 딸아이는 내가 옆에 있었던 신생아 때를 기억하진 못한다. 하지만 나는 그때의 선택에 단 하나의 후회도 없다. 딸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함께 해온 시간들은 내 인생에 있어 가장 소중한 시간들이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신이 나에게 다시 한번  그때 선택할 수 있는 순간으로 가는 타임머신 티켓을 선물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 선물을  받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솔직하게, 그때 그곳에서 보냈던 10개월이라는 꿈같은 시간은 가끔.. 아니 많이 그립기는 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은 추억이 되고 추억은 꿈이 된다. 그리고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때의 시간들이 지금의 나에게 그렇게 느껴진다.

점점 희미해져 가는 그 추억을 생각하며 글로 옮길 때면, 나는 시각피질을 발동하며 그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리고는 한다.

한 번쯤은 다시 그 꿈같던 현실로.. 아니 현실 같은 꿈으로 다시 한번 들어가 보고 싶은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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