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국에 돌아왔지만 외국에 있을 때보다 더 외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타인과 내 인생을 비교하며 열등감을 가지는 것만큼 스스로를 갉아먹는 것이 있을까?"
나는 이 덫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독서와 운동을 시작했다. 특히 유약한 마음 근육을 키우기 위해서 양서를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다. 그 결과, 자기 계발서와 전공 서적만 읽었던 과거와 달리, 이때의 고독함을 계기로 시작한 독서는 내 인생에 좋은 자양분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과거에 내 인생의 무게중심은 항상 사람에 있었다.
하지만, 그 무게중심을 나한테로 옮기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과거의 나는 그러지 못했지만 지금.. 그리고 앞으로는 타인을 신경 쓸 시간에 스스로를 더 단단하게 채워야 한다는 것을 온몸으로 체감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저마다 모두 '각자의 인생, 각자의 속도'가 있다.
그리고 어떤 나이에도 '이 나이에 늦었다'라는 말은 틀렸다고 생각한다. 나이 때문에 조급했었던 나의 과거를 뒤돌아보면 삶의 어떤 시간에도 실은 늦게 도착한 적은 없었다. 재수를 하는 학생도, 취업을 하는 청년도, 결혼을 준비하는 직장인도 모두 정해 놓은 나이에 이뤄내야 한다는 공통된 잣대를 들이밀었던 것뿐이다.
'그래.. 나는 내 시간을 살아갈 뿐이다.. 내가 겪은 변화들 그리고 내 시간을 살며 만난 사람들과 알게 된 경험들.. 그런 것들을 소중히 여기며 그냥 내 나이를 받아들이면서 내 속도로 걸어가면 된다. 남을 부러워할 시간에 차근차근 내가 되어 가는 편이 낫다. 진짜 어른이란 나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나의 이야기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런 어른이 되면 된다.'
그렇게 나를 채워가는 시간 속에서... 나는 조금씩 어른 수업을 혼자서 독학하고 있었다.
정말 다행인 것은 이렇게 나를 채워가는 시간 속에 우연한 행복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내 인생 최대의 행복이자 행운인 딸내미 었다. 모든 부모들이 공감하는 말이겠지만 갓난아기를 보고 있으면 내 마음속 모든 근심과 걱정들이 정화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사랑스럽다'라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하다. 우주를 얻은 기분이랄까.. 아이를 통해 얻게 되는 행복함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어떤 순간의 행복과도 견줄 수 없는 '행복의 최대치'임에는 분명하다.
또 다른 하나는 당장 눈앞에 생계를 위해서 시작한 '영어학원강사'일이었다. 학원강사는 고육지책으로 시작하긴 했지만 나의 적성에 꽤 잘 맞는 일이었다. 사실 영어 자체에 자신감이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프랜차이즈 학원의 경우 거의 시스템이 완성되어 있기 때문에, 선생님의 영어 실력보다도 아이들과 학부모가 어떻게 하면 학원을 더 좋아하고 만족해 할 수 있는지의 역량이 중요했다. 나는 다른 강사들처럼 영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잘하지 못했다. 하지만, 은행 고자산 고객을 담당하며 터득한 고객관리방법과 오픈 주방에서 초밥을 만들며 외국인들을 응대했던 담력이 이 일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처음 잡아보는 분필이었지만 아이들 앞에서 선생 노릇을 하는 건 꽤나 즐거웠다. 게다가 다른 선생님들이 제일 기피했던 업무인 학부모 상담은 나에게는 오히려 어렵지 않은 과제였다. 은행에서 고객을 응대하며 쌓은 cs스킬과 관찰력은 영어학원에서 학부모들에게도 통했기 때문이다. 학부모들과 원생들로부터의 좋은 피드백 덕분에 원장 선생님은 점점 나를 신뢰하면서 학원의 주요 이벤트나 강의를 전적으로 믿고 맡겨주셨다.
최근 몇 년 동안 은행과 주방에서 혼나기만 하며 바닥까지 내려갔던 자존감이 학원 생활을 통해 회복되고 있었다. 운인지 실력인지 모르겠지만 초반에 인기 강사로 좋은 호응을 얻게되면서 내가 맡은 반에 아이들이 늘어나면서 한 개 반이 더 신설되기도 했다. 그렇게 3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원장은 나에게 월급 인상과 대표 강사직을 제안했다. 그리고 3개월 만에 월급을 180만 원에서 300만 원까지 올려주었다. 급여 인상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정말 오랜만에 받아보는 '인정'에 행복했다.
그때의 감동은 마치 '나한테 꼭 맞는 옷을 입어서 모든 사람들이 잘 어울린다고 칭찬해주는 기분'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쉽게 전해주는 일.. 지식을 즐겁게 배울 수 있도록 기획하는 일.. 걱정하고 있는 부분을 상담해 주는 일..
여태까지의 시간이 내가 어떤 것이 부족한지 알아가는 시간들이었다면, 이곳에서는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 확인하고 인정받을 수 있었던 시간들이었다. 오전에는 딸아이를 돌보면서 개인 운동을 했고, 오후에 출근해서 저녁까지 일을 하고 집에 가도 오히려 예전에 은행을 다녔던 때보다 빨리 귀가하는 시간이었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는 회식이나 야근 때문에 할 수 없었던 운동과 독서를 꾸준히 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겨서 좋았고, 원장과 동료 강사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록 자존감이 많이 올라갔다. 그 자존감은 자신감의 원동력이 되었고 점점 더 스스로 마음에 드는모습으로 변모해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어쩌면 이 학원 사업과 강사 일이 나에게 천직일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되면서, 나중에는 나의 학원을 차리면 좋겠다는 목표까지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목표와 꿈이 생기자 다시 나의 인생에도 활력이 생기기 시작했다.
... 그렇게 1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300일쯤 되었을 때 아내가 나에게 말했다.
"학원 강사는 너무 불안정한 거 같아. 더 늦기 전에 취업을 다시 하면 안 될까?"
"..."
사실 나는 은행이라는 조직 이외에 회사다운 회사생활을 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처음 4년 동안 은행에서의 회사 생활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다시는 그곳 비슷한 곳으로라도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침착하게 아내를 달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나이가 중요해서 서른다섯 살에 신입으로 입사하는 건 어려울 거야"
"저축은행 같은 2 금융권에 경력직으로 들어가면 안 돼?"
"..."
"은행에는 경력직이 거의 없어..."
우리의 현재 상황을 봤을 때 아내가 어떤 마음으로 말했을지는 충분히 이해가 갔다. 산후우울증과 점점 크는 아이를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이해를 하면서도 내심 아내의 말이 서운했다. 내가 그 조직에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리고 어떤 결정을 하고 돌아서 여기까지 왔는지 가장 옆에서 지켜봐 온 배우자가 그런 말을 하니까 서운함과 배신감 같은 감정이 차올랐다.
하지만, 나의 그런 개인적인 감정으로 못한다고 하기에는 믿고 따라와 준 시간들에 대한 고마움이 더 컸기 때문에 아내의 말을 도저히 무시하고 지나칠 수는 없었다.
"당신이 정 그렇다면.. 이번 하반기 취업에 딱 한 번만 제대로 해볼게"
그렇게 정말 어쩔 수 없이.. 서른다섯살에 나는 다시 취업준비생이 되었다...
새벽 시간부터 출근 전까지는 취업준비생으로, 오후와 저녁 시간에는 학원에서 일을 했다. 야간에는 아이를 재우고 나서 입사원서를 작성했다.
7년 만에 다시 돌아온 취업시장.. 많은 것들이 예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처음 들어보는 NCS라는 시험... 다시 만들어야 하는 영어점수... 그리고 아예 무슨 말인지도 잘 모르겠는 코딩지식까지.. 세상이 예전과는 다른 역량을 나에게 요구하고 있었다.
"... 이거 내가 할 수 있을까?"
나는 도전하고 부딪히는 걸 두려워하지는 않지만 애당초 누울 자리가 아니면 다리를 뻗지도 않는 성격이기도 했다.. 아무리 긍정회로를 돌려봐도 이성적으로 합격할 것 같은 사이즈가 나오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한국의 취업 시장에서 은행을 퇴사한 서른다섯 살은 신입도 아니고 경력도 아닌 취업 난민일 뿐이었다.
나의 불안한 느낌은 꽤 정확하다.
7년 전 절반 이상 서류통과를 했었던 것에 비하면 나는 일단 서류통과 자체가 아예 되지를 않았다.
"아.. 이거 그냥 나이에서부터 잘리는 기분인데.."
그때였다.. 운명인지 필연인지 알 수 없는 기회가 왔다.
사회적 이슈로 은행 채용비리 문제가 터지면서 내가 준비했던 딱 그 시점부터 완전 블라인드 채용 형식으로 취업 전형이 바뀐 것이다... 채용 자체를 외부업체에 위탁하면서 나이와 학력, 경력 등 모든 것이 똑같은 상황 속에서 경쟁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어쩌면 이건 내가 공평하게 경쟁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겠구나'라고 순간 직감했다.
7년 전.. 누구보다 치열하게 준비했었던 은행 취업이었기 때문에 새롭게 생긴 필기시험과 디지털 관련 지식을 제외하고는 취업 전형이 그렇게 낯설지는 않았다.
"어쩌면.."이라는 희망의 끈을 붙잡고 나는 다시 옛날 그 간절했던 시간으로 되돌아갔다.
은행은 매우 보수적인 집단이라서 퇴사를 했던 기록이 있거나 최종합격을 하고 입사하지 않은 기록이 있다면, 다시는 재입사하기 힘들다 라는 은행원들 사이의 불문율이 존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 이후로 꽤 많은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해보자'라는 생각으로 도전했다.
그렇게 두 달 동안 육아와 학원일을 하면서 필기시험과 면접을 준비했다.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모든 면접 노하우를 복기하고, 필기시험 통과를 위해 필사적으로 집중했다.
10살 어린 똑똑한 대학생들과의 경쟁에서 경쟁력을 가지려면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다.
그래서 기존에 퇴사했었던 S시중은행을 제외한 네 곳의 시중은행만 선택과 집중을 통해 전략적으로 준비를 했다.
서류통과.. 필기시험.. 실무 면접.. 최종면접 통과까지...
'마침내 나는 기적 같은 일을 해냈다'
7년 전에도 최종 합격 되었지만 S은행을 가기 위해 포기했었던 W은행에서 나를 다시 뽑아주었다.
아내는 매우 좋아했다. 그리고 나는 가족들의 많은 축하연락을 받았다.
기쁘면서도 기쁘지 않은 속마음을 뒤로한 채.. 그렇게 나는 다시 한번 서른다섯 살 신입행원이 되었다.
이 세상에 우연히 찾아오는 행운은 없다.
많은 사람이 복권 당첨도 우연히 찾아온 행운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꾸준히 복권 구입을 하니까 당첨된 것이다.
우연한 행복을 바란다면.. 먼저 자신이 지금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누군가에게 변명하기 위한 최선이 아닌, 자기 스스로한테 부끄럽지 않을 최선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우연한 행복은,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특별한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