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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뱅대리 Apr 28. 2024

잔혹한 낙관주의

'잊지 말자.. 나는 우리 가족의 자긍심이다'

3년 만에 돌아가는 한국행 결정에 아내는 매우 상심했다. 심지어 보고 싶었던 가족들과 친구들에게도 이런 결정을 알리는 것이 '패배자'처럼 보일까 봐 자존심이 상한다고 말했다.

처음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나의 모든 결정을 묵묵히 따라주었던 아내였기 때문에 그 말을 들을 때 나 역시도 굉장히 마음이 속상했다. 아내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성취에 대한 집착과 욕심 때문에 스스로를 갉아먹었던 나의 지난 과거가 생각났다.

'이것이 아니면 절대 안 돼'라는 집착은 건강한 사고방식이 아니다. 애착이 지나치면 실망이 커지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말이 쉽지 이런 진리를 깨닫고 스스로 늪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무엇보다도 내가 힘들었던 감정을 똑같이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든 좋은 기분을 디자인해보려 노력했다.

그런 노력의 하나로 한국에 들어가기 전, 호주 골드코스트를 경유하여 한국에 들어가는 태교 여행을 제안했다. 뉴질랜드의 광활한 자연과는 다르게 호주의 골드코스트 해변은 마치 신이 아기자기하게 만들어놓은 작품 같았다. 우리는 그곳에 있는 일주일 동안, 함께 요리학교를 다녔었던 형의 따듯한 환대와 가이드를 받으며 호주에서의 행복한 추억을 고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3년 만에 돌아온 한국의 1월은 내 평생 가장 추운 겨울이었다. 인천공항 출입문이 열리자마자 밀려오는 찬바람에 숨을 쉬기 힘들 정도였었다. 그렇게 인천대교를 건너며 바라보는 한국의 야경을 보면서  '꿈에서 다시 현실로 되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 잘될 거야.. 할 수 있어"


누구에게나 불확실성과 실패의 가능성은 어둠 속에서 나는 무서운 소리와 같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확실성보다는 불행해지는 것을 선택한다.

하지만, 나는 비록 실패했다는 소리를 들을지언정 불행해지는 선택을 했던 적은 없다.

우리는 장모님 댁에 당분간 함께 있기로 했다. 출산 이후 가족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곳에 있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렇게 뉴질랜드에서 한국에 도착한 다음날부터 나는 다시 일거리를 찾아다녔다. 여태껏 성실하게 학교생활을 하면서 장학생의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했고 시중은행 입사까지 했었는데...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무기가 어떤 것도 없다는 사실이 좌절스러웠다.

그럴 때마다 혼자 주문처럼 이 말을 되뇌었다

"아니야.. 할 수 있어. 잘 될 거야"

나는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애써 스스로를 격려하기에 바빴다. 이때부터가 '잔혹한 낙관주의'의 시작이었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갑자기 서른네 살의 백수가 되어있었다. 그것도 아무 대책도 없는 무방비 상태인..

열정이라는 무기와 청년이라는 타이틀 하나로 밀어붙였던 지난 과거의 노력처럼 구직활동을 하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생지옥은 사람을 행동하게 만들었다.

나는 강남에 있는 보험 모집인 설명회부터 시작해서 집 근처 일대를 아다니며 전봇대에 영어개인과외 전단지를 붙이고 다녔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건 목 빠지게 기다리던 영어과외 연락이 딱 한 명 왔었는데 다단계 판매를 하시는 분이셨다. 그분은 오히려 나에게 본인의 상품을 함께 영업하자며 제의를 하셨다.. 유일하게 연락을 준 고객이 지금의 나의 상황을 이용하려는 사람이라는 게 참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는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다'라는 의심 없는 확신을 가지는 것이 정말 중요하구나 라는 생각을 그때 많이 하게 되었다. 왜 과거에 어른들이 그렇게 기술을 배우라고 했는지도 그때 돼서야 실감이 다. 그리고 그런 자괴감이 들 때마다  과거의 선택을 자책하는 방향으로 나의 생각회로는 돌아갔다. 하지만,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이번에는 스스로를 가스라이팅하지 않았다.


'그래.. 인생의 선택들이 쌓이면 그게 지금의 나야. 과거의 선택들이 모여서 지금의 내가 여기에 서 있는 거다. 그 어떤 것도 후회하지 말자'

혼자 수백 번 마음을 다잡았지만 조급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당장 지출되는 월세부터 생활비까지 생각하면 다단계던 전단지던 나는 일을 해야만 했다.

그래도 몇 년 동안 해외에 체류한 경험을 가지고 당장 어필할 수 있는 것은 '영어학원 강사'였다.  스스로 영어를 잘한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어찌 되었건 이력서에 적힌 나의 걸어온 길은 동네 영어학원에서는 통용되는 스펙이었다. 그렇게 집 근처에 있는 영어학원에 면접을 보고 바로 그다음 날부터 출근을 하게 되었다.

한 달 월급 180만 원... 세 가족이 생활하기에는 턱 없이 부족한 돈이었다. 장모님네 집 한편에 같이 살아서 식비는 아낄 수 있었지만 현실은 월세와 보험료를 내는 것도 부족했다.

'아이가 태어나면 더 많은 지출이 생길 텐데... 어떡하지..'

편의점에서 캔커피 하나 사 먹으며 죄책감을 느끼는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괜찮아.. 다 잘될 거야"


지금의 불안한 마음을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었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지인들을 만나면 왠지 이 감정들이 조금이나마 해소될 것 같아서 용기 내어 연락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오산이었다. 불과 3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내가 다른 세상에 있는 시간 동안 한국에서는 많은 것이 변해있었다. 일단 만났을 때 대화의 주제부터가 달라져있었다. 예전에 만나면 연애 이야기나 안부를 묻는 등 다소 가벼웠던 수다의 주제가, 이제는 부동산과 주식 등 돈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데 사람들은 집중하고 있었다. 나와 비슷한 월급쟁이였던 주변의 지인들은 저마다 집을 사고 투자를 해서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지금 캔커피 하나 사 먹는 것에도 부담을 느끼는 처지인데 집값이 몇 억이 올랐다 얼마를 벌었다 하는 지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면, 나만 빼고 모두가 로또에 당첨된 것 같은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당시에 나는 그런 대화에 참여할 수 있는 지식의 깊이도 없었고, 알았어도 행동할 수 있는 자본력도 없었다. 게다가 그런 대화를 옆에서 계속 듣고 있다가 보면 나 혼자만 뒤쳐진다는 조바심과 함께 그 마음이 상대적 박탈감으로까지 이었졌다.

그런 상태와 감정을 요즘말로 표현하면 '벼락거지'라고 하는데 그때의 내 상황이 딱 그랬다.

그냥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산 죄 밖에 없는데... 다시 한국에 돌아온 나는 돈도 마음도 결핍으로 가득 찬 '거지'가 되어있었다


그때 나는 확실히 한 가지를 배웠다.

'행복의 반대말은 불행이 아닌 비교라는 것을..'

보통 깨달음은 행복이 아니라 좌절과 고통 속에서 온다. 고민과 갈등의 시간도 결국 성장으로 가는 과정이다. 지금 이 답답한 현실이 '동굴이 아닌 끝이 보이는 터널' 이기를 기도하며 스스로 눈과 귀를 막았다. 그렇게 알 수 없는 패배의식과 열등감에 사로잡히면서 더 이상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무섭고 싫어졌다.


'사람이 마음을 아끼다 보면... 가장 먼저 얼어붙는 건 본인의 마음이다'

그렇게 얼어붙은 마음 때문에 나는 한국에 돌아와서조차 보고 싶었던 사람들에게 대부분 연락을 하지 못했다. 스스로 고독의 덫을 놓고 그곳에 나를 가둬버린 것이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던 옛 속담은 정말 속 좁고 놀부 같은 심보의 사람들만 가지는 편협한 감정이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그때의  내가 느낀 감정은 이런 비슷한 것들이었다.

확실한 것은 이 열등감인지 치사함인지 모를 내 안의 감정이 나를 갉아먹고 있었다...

 좀 먹는 감정을 걷어내기 위해 내가 정면돌파를 선택한 방법은 , 그 비교 대상을 칭찬함으로써 나에게 되돌아 올 질문들을 사전에 원천봉쇄 해버리는 것이었다. 진정 그 사람들을 칭찬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사실은 상처받기 싫어서 스스로 방어하기 위해 했던 행동들이었다.

이 과정 속에서 한 가지 깨달은 점은

'승부욕 같은 감정은 이런 상황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성장하고 싶다면 인정이 먼저다.. 남을 인정하는 과정이 곧 나의 발전을 위한 필수조건인 이유이다.


지금 나의 상황이 이렇게 되었지만, 나는 여태껏 내가 걸어온 발걸음을 의심해 본 적은 없다..

방황한다고 해서 길을 잃은 것은 아니라는 소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유들로 나는 고국에 들어오자마자 어느새 '가시 돋힌 고독한 고슴도치'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런 상황 속에서 드디어 딸아이가 세상에 태어났다


예전과 달라진 점은 나는 이제 더 이상 내 탓을 하지 않는다... 나의 치열함은 죄가 없다.. 안 되는 세상이 문제 일뿐

아무리 다시 생각해 보아도 내가 했던 노력과 과정은 아무런 죄가 없다.

누가 내 노력과 과정을 평가해?

리고 이럴 때마다 나의 마음 바닥을 콘크리트처럼 지지해 줬던 마법의 주문이 있다.

"잊지 말자 나는 우리 가족의 자긍심이다"


다시 돌아온 한국.. 아빠라는 새로운 역할..

철없던 피터팬의 진짜 어른인생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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