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슬 이영순 Dec 31. 2023

마지막 비행

287개 방의 비밀

    분명 블루베리 나무를 사다 심었는데 막상 맺힌 열매는 시고 떫은 아로니아였다. 시면 떫기나 말던지. 아무리 몸에 좋은 열매라고는 하나 우선 먹기가 거북하니 손이 가질 않는다. 차라리 베어버리고 꽃씨나 뿌려볼까 해도 워낙에 큰 화분이라 혼자 힘으로는 어찌해 볼 방법이 없다. 남편에게 도움을 청하자니 애당초 흙도 한 줌 없는 마당에 나무가 가당키나 하냐는 핀잔을 들은 터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나뭇가지는 터벅 머리같이 엉키고 말았다. 


  이파리가 제법 파릇해질 무렵이었다. 화분을 엎지 못할 량이면 더 이상 자라지나 못하게 전지(剪枝)라도 해야겠다 싶어 가위를 들이밀었다가 하마터면 벌에 쏘일 뻔했다.


  녀석은 어쩌자고 이곳에 자리를 잡았을까 꿀벌을 제외한 벌이란 벌은 눈에 띄는 족족 후려쳐서 결단내고 마는 사람이 사는 집에, 그것도 모자라 오늘 베어버릴까 내일 베어버릴까 벼르고 있는 아로니아 나무의 여리고 여린 이파리를 지붕 삼아 둥지를 틀었을까. 섶을 지고 불길 속으로 뛰어든 꼴인데도 녀석은 나를 보자 위협 비행을 한다. 


  녀석의 흥분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둥지를 들여다보니 살이 통통하게 오른 애벌레 대여섯 마리가 몸을 앞뒤로 주억거리며 연노랑 고치를 자아내고 있다. 안 봤으면 모를까. 아무리 미물이라고 해도 새끼를 품은 어미인데 어찌 매정하게 내칠 수 있겠는가. 나는 그만 앞뒤 재어볼 생각도 않고 녀석들의 주인이 되어주기로 작정을 해 버렸다. 


  녀석의 이름은 참어리별쌍살벌이다. 나는 이 녀석의 긴 이름을 싹둑 잘라 어리별이라고 부른다. 녀석과 첫 상면을 한 후 식구들에게도 이들 가족의 무단입주를 알렸다. 어리별은 먼저 건드리지만 않으면 공격을 하지 않는 순한 벌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믿기로 하고 녀석들이 삶을 다하고 떠나는 날까지 좋은 주인이 되어주자고 했다. 


  그날 이후 집안에서의 내 관심사는 온통 어리별에 쏠렸다. 처음에는 예닐곱 개에 지나지 않던 아기 방이 어느 틈에 수를 헤아리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번창해 그야말로 벌떼가 형성되었다. 생각해 보니 작년 가을에도 아로니아 굵은 가지에 매달려있는 빈 둥지를 본 것 같다. 한 삼십 개 남짓 되어 보이는 아기 방이 너덜너덜 찢어진 채 바람 앞에 놓여있었다. 어떤 동·식물이든 생장 조건이 맞으면 번성하기 마련인데 그때 보았던 벌집은 크기도 모양도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아마 식구를 더 늘릴 수 없었던 어떤 상황에 처했었나 보다. 


  그러고 보니 어리별이 아로니아 이파리를 지붕 삼은 까닭을 알 것도 같다. 비록 작고 여리기는 하지만 비가 오면 빗물을 받아내주고 햇볕이 쨍한 날에는 그늘도 만들어 줄 수 있는 이파리가 가지에 비해 그나마 나아 보였던 모양이다. 거기다 주인 여자까지 저희들을 애완동물 대하듯 하니 이보다 더 좋은 생장 조건은 없을 터이다. 


  연일 비가 내리고 있다. 이파리의 크기를 벗어나버린 둥지의 한쪽 면이 속수무책으로 젖고 있다. 화분을 처마 밑으로 들여놓고 싶어도 무겁기도 하려니와 녀석들이 깨어있으니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는 그때 믿기 힘든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한 방울, 두 방울, 세~방울.... 

  둥지 밖으로 떨어지는 진주방울들. 서너 마리의 일벌들이 둥지에 스며든 물기를 빨아내 쥐어짜듯 뱉어내고 있다. 대체 저 작은 몸 어디에 그만한 물을 고았다가 뱉어내는 걸까. 가끔 꽃가루를 경단 모양으로 만들어 양쪽 겨드랑이에 끼고 돌아가는 꿀벌은 보았어도 이런 모습은 처음 본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가장자리에서는 일벌들이 총결집해서 몸으로 빗물을 퉁겨내고 있다. 위대한 모성의 거룩한 몸짓이다. 


  어리별은 이제 나에게는 곤충이 아니라 돌봐야 하는 생구(生口) 같은 존재가 되었다.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있으면 밤을 틈타 그 큰 화분을 걸음마시키듯이 끌어서 처마 밑으로 들여놓고, 햇볕이 찡한 날에는 녀석들의 마른 목을 축여주느라 돌확이 넘치도록 물을 채워 놓기도 했다. 이만하면 녀석들도 내 진심을 알아주겠지. 


  햇볕 따가운 어느 날 둥지의 열기를 식히느라 날개로 부채질을 해 주고 있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다가 그만 양쪽 손목을 쏘이고 말았다. 순식간이었다. 피할 겨를도 주지 않고 정말 벌처럼 쏘고 갔다. 그간에 내가 저희들한테 쏟은 정성이 얼만데 괘씸한 녀석 같으니라고. 처음엔 정확하게 어디를 쏘였는지 모를 만큼 따끔한 정도이더니 다음날 아침이 되니 양쪽 손목 부위가 페르난도 보테로의 작품 속에서나 봄직한 인물처럼 되어 있다.  가뜩이나 더운 날씨에 쏘인 부위가 얼마나 가려운지 어디 앙갚음이라도 해야 직성이 풀릴 것만 같은데 화풀이 대상이 없다. 


  비가 오고 햇볕이 내리쫴도 녀석들은 둥지 증축 일을 멈추질 않는다. 둥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이파리가 아래도 축 쳐졌다. 저러다가 잎자루가 툭 부러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바라보는 나는 조마조마한데 어리별 무리는 너무나 태연하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한 가지에 매달린 다른 잎들은 진딧물이 꼬여 누렇게 오그라들었는데 어리별 둥지를 매달고 있는 이파리만 유난히 반짝대고 있다. 그러면 그렇지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어. 이따금씩 잎맥 여기저기를 여미듯 훑고 다니는 녀석을 본 적이 있다. 녀석이 어떤 방식으로 임대료를 지불했을지 얼핏 알 것도 같다. 


  추분을 하루 앞둔 일요일. 산행을 하고 돌아와 녀석들의 집을 먼저 살폈다.


  “……”


  그렇게도 음전하게 품을 여미고 있던 둥지가 늙은 어미의 마른 가슴 같은 속을 있는 대로 드러내고 있다. 순간 홀로 남겨진 듯한 묘한 외로움이 엄습해 왔다. 때가 되면 떠날 것이란 걸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날이 오늘이 될지는 몰랐다. 그 많은 어리별은 대체 어디로 날아올랐을까. 아침에 집을 나설 때만 해도 어깨동무하듯 서로를 에워싸고 있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럼 그 몸짓이 마지막 비행을 위한 의식이었단 말인가. 


  녀석들이 애면글면 지키려고 했던 둥지를 가만히 거둬 내렸다. 솜처럼 가볍다. 녀석들이 그렇게 살벌하게 지켜내려고 한 것은 둥지가 아니었음을. 그러나 저러나 대체 몇 마리나 되는 일벌이 생산되었을까. 방을 헷갈리지 않고 세는 방법을 생각하다가 소나무 잎을 하나씩 꽂아보았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육각형의 방이 287개나 된다. 더러는 방 하나에서 두 번 이상의 애벌레를 키워내기도 했으니 대충 계산해도 우리 집은 그야말로 어리별 천지가 되어 있어야 했는데 신기하게도 자연이 그 개수를 조절해 준 모양이다. 


  어리별은 오직 한 마리 어미벌 만이 살아남아 다음을 기약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많은 일벌들은 대체 어느 별을 향해 마지막 비행을 떠났을까. 어리별이 날아올랐을 하늘은 왜 또 이렇게 처연하리만치 맑고 투명한지.      


  “넌 가슴 아파하겠지. 내가 죽은 것처럼 보일 테니까.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닐 거야…”     


  나를 위로하듯 속삭여주는 어린 왕자의 목소리. 그래 그건 사실이 아닐 거야…… 


작가의 이전글 흔들리며 오는 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