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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이영순 Jan 07. 2024

길 위에서

길 위의 聖者

  그녀를 처음 맞닥뜨린 것은 2020년 7월, 출근 시간이 10시에서 9시로 앞당겨지면서부터였다. 전철역과 연계되는 205번 마을 버스정류장 인도를 덮고 있는 쓰레기더미를 피해 가다가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했다.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은 그 환경에 익숙한 듯 차도의 안전선을 넘어가면서도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인도에 쌓인 쓰레기더미는 재활용이 가능한 물건들을 모아놓은 듯 보였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통행에 방해가 될 정도의 방치는 좀 곤란하지 않을까. 출근 즉시 시청에 민원을 넣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쓰레기의 일부처럼 앉아 분리작업을 하는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인도를 이렇게 막고 있으면 어떡해요.’ 볼부은 소리로 쏘아붙였지만 그녀는 대답은커녕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튿날, 그녀는 내가 흘린 말을 새겨들었던지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만한 공간을 틔워 놓고 종이박스의 이음새를 칼질하고 있었다. 칼날을 쥔 손이 움직일 때마다 산사태처럼 흘러내린 그녀의 젖가슴이 고스란히 드러나 보였다. 존재를 아예 무시하고 지나치면 모를까 입으나마나한 축 늘어진 민소매 옷이 오히려 시선을 잡아당겨 그녀에게 집중하게 만든다. 


  그녀의 칼질에 주저앉은 종이상자 안에서 일반쓰레기가 쏟아진다. 종량제봉투에 넣어서 버려야 할 일반쓰레기와 담배꽁초까지 뒤섞여 있다. 그런데 그녀는 이 상황이 익숙한 듯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근처에 있는 느슨하게 묵힌 일반쓰레기봉투의 매듭을 풀어 쑤셔 넣는다. 버리기 전에 마음 한번 써 주고 손길 한 번만 더해주는 일이 그리 번잡한 일도 아닐 터인데… 그녀의 묵묵함에 기대는 것인지 업신여기는 것인지 괜스레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하긴 나도 그녀를 처음 봤을 땐 업신여기는 마음이 없진 않았으니까 … 


  그날 이후 나는 종종 출근 시간을 어겨가면서까지 그녀를 훔쳐보게 되었다. 

어느 날은 버스를 기다리는 척하면서, 어느 날은 근처의 베이커리 집에서 그녀를 훔쳐봤다. 그녀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니 쓰레기를 분리하는 대에도 나름대로 방식이 있는 듯 보였다. 종이상자의 이음새 부분을 다 자르고 나면 손수레의 짐칸을 채울 것들과 그 위에 올려놓을 것들을 크기별로 분류한다. 마치 담장을 쌓듯이 아귀가 맞지 않으면 작은 것들을 끼워 넣어 공간을 채우고 부피가 큰 대형 상자는 수레의 폭에 맞추어 널을 깔듯이 차곡차곡 쌓아 올린다. 그렇게 종이류를 다 처리하고 나면 다음은 각종 플라스틱 종류의 물병들을 하나하나 발로 눌러 부피를 줄여 자루에 담는다. 재촉하는 사람도 없고, 눈치 주는 사람도 없어서인가 그녀의 행동이 굼뜨기가 이럴 데 없다. 저렇게 느려서야 이 많은 것들을 언제 다 처리하고 길을 틔워줄지. 그 와중에 휴대용 가스용기에 구명까지 뚫는다. 그녀의 손을 거치지 않았다면 모두 일반쓰레기로 휩쓸려 나갈 물건들이 그녀의 손길에서 새로운 쓰임을 부여받는다. 


  물병을 밟는 그녀의 발가락에 눈길이 닿았다. 그런데 발가락 모양이 이상하다. 슬리퍼 앞으로 쏠려 나온 왼쪽 검지발가락이 엄지발가락을 어설픈 자세로 누르고 있다. 그래서 걸음걸이가 불편해 보였구나. 손가락 역시 마디마다 옹이처럼 툭 불거져 나와 성한 손가락이 없어 보인다. 


  대체 이 많은 것들이 어디서 쏟아져 나온 걸까. 옷가지와 신발에서부터 소형가전제품에 이르기까지 내다 버린 물건의 종류도 다양하다. 일회용 음식용기, 재활용이 가능한 비닐, 주변 음식점에서 내다 버린 것으로 보이는 깨진 그릇과 양념통 등이 그녀의 지시대로 각각의 자리를 찾아간다. 그녀가 철 지난 외투 하나를 집어 들어 한참이나 들여다보더니 손수레의 손잡이 위에 걸쳐 놓는다. 자신에게는 전혀 맞을 것 같지 않아 보이는데 누구 소용될 사람이라도 생각 난 모양이다. 


  어느 날 퇴근길에 평소와 다른 입성을 하고 있는 그녀를 보았다. 버스정류장 간이의자에 앉아 인근 가게에서 내다 버린 것으로 보이는 상한 과일의 성한 부분을 베어 먹던 그녀가 멀찍이 서 있는 남자를 향해 손짓을 했다. 남자의 행색이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게 보였음인지 그녀는 그중 성한 것을 골라 남자의 몫을 지어 놓는다. 영문 모르고 다가섰던 남자는 간이의자에 펼쳐놓은 것들을 보자 대뜸 삿대질을 하며 발끈 화를 냈다. 내가 이런 음식이나 얻어먹을 사람으로 보이느냐는 표정이다. 


  "먹을 만한데… "


  3년 가까이 보아온 그녀의 목소리를 그때 처음 들었다. 저마다의 마음속에는 신성이 있다는데 그녀의 마음속에는 어떤 신성이 자리하고 있을까. 

  누르고 다독이고 동여맨 그녀의 손수레가 저만치 지친 걸음으로 멀어지고 있다. 앞에서 끄는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마치 수레가 그녀를 밀고 가는 듯 찻길을 아슬아슬하게 걸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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