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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혜건 Mar 05. 2024

진짜 재미없는 소설 (上)

비행운 #1

 많이 춥지도 않고, 그렇다고 따듯하지도 않은 날이었다. 누군가에게 '3월 4일의 날씨가 어떨까요?'라고 묻는 다면 '이렇지 않을까요?'라고 대답이 돌아올 만큼 모난 곳 하나 없는 그런 날. 지훈은 꿈에 그리던 한국대학교에 합격하여 드넓은 캠퍼스를 누비는 새내기들의 들뜬 모습을 은근히 보고 싶었다. 하지만 산에 있는 학교, 그중에서도 제일 위에 있는 공학관은, 새내기들의 설렘에 비하면 다소 부족한 재학생들의 반쪽짜리 설렘으로 가득 차있었다. 그는 익숙한 노란색의 셔틀버스를 타고, 익숙한 건물로 들어가, 익숙한 강의실로 들어갔다.


 강의실 문을 열고 빈자리를 찾아서 앉는 과정은 꽤나 재미있었다. 지난 학기에 수도 없이 반복했던 과정이지만, 2달 남짓한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한번 강의실 문을 열고 빈자리를 찾아서 앉는 과정에서는, 개강을 맞이한 학생들 모두가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한 책상에 의자 3개가 들어가 있고, 그 책상이 몇십 개 존재하는 강의실. 디자인적으로 특이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좋게 표현하자면 깔끔한 것이고 나쁘게 표현하자면 밋밋한 강의실에 학생들이 하나둘씩 들어왔고, 마지막으로 교수님이 들어왔다.


 한국대학교의 공식 개강일이자, 한 학기 동안 이어질 수업의 첫날에 교수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어주셨다. "저는 공정 분야만 연구해서, 화학이나 생물학 분야는 여러분이 저보다 더 잘하실 겁니다." 공정 분야가 재미있어서 공정 쪽을 깊게 연구했다는 교수님의 모습에서는 여유로움이 흘러나왔다. 곧 퇴임을 앞두신 교수님은 더 이상 자신의 연구실에 학생을 받지 않을 거라고 하셨다. 지훈은 교수님의 퇴임 전에 졸업하지 못한 대학원생들이 어디로 흩어질지, 아니면 모두 졸업에 성공할지 잠시동안 고민했다.


 펜슬을 오랜만에 잡는 감각은 낯설다. 이름은 펜슬이지만, 물론 진짜 연필은 아니다. 중요한 내용을 받아 적는 손이 어딘가 어색하다. 하루이틀이면 적응이 끝날 일이지만, 오랜만에 쓰는 글씨는 기분 탓인지 평소보다 더 삐뚤빼뚤해 보인다. 어릴 때부터 수도 없이 잡아본 연필이지만, 잠깐 공백의 기간 동안 손은 연필 잡는 방법을 잊어버린 듯하다. 교수님은 지금 이 순간이 어색할까? 교수가 된 순간부터 수도 없이 많은 강의를 해오셨을 테지만, 당신 역시 오랜만에 하는 강의이지 않은가? 아무래도 조금은 어색할 거라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린 채로, 그는 다시 교수님의 입을 쳐다보았다.


 첫 수업이 다들 그렇듯이, 본격적인 진도를 나가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야기를 좋아하는 교수님들이 다들 그렇듯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한 학기 동안 배울 공정유체역학은 유체역학의 한 종류라는 사실. 우리는 이번 학기에 제일 간단한 물질인 물의 흐름을 공부할 것이라는 사실. 하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물처럼 간단한 상황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 지훈이 끊임없이 주어지는 일련의 사실들에 조금 피로감을 느끼고 있을 때 즈음, 교수님은 하나의 또 다른 사실을 강의실 한가운데로 부드럽게 던졌다. "나는 지금까지 매 수업마다 학생들에게 자기소개서를 받아왔어요. 그냥 뭐 자기가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을 쓰는 거죠. 이번 수업에서는 자기소개서를 받지는 않을 계획입니다. 예전에 내 수업을 들은 어떤 학생이 자기소개서에 이런 말했어요. 사회가 얼마나 삭막할지 두렵습니다."


 교수님은 잠시동안 생각하시더니 또 다른 거대한 사실을 강의실에 떨어뜨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에 나가면 건강한 에너지를 얻습니다. 사회는 삭막하지는 않아요. 정말 가진 게 없으면 삭막합니다. 힘들어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지금 가진 것은 없어요. 통장에 돈이 얼마 있겠어? 그런데 여러분들은 기본적으로, 한국대학교를 졸업하고 나갈 거잖아요. 그러면 대한민국 1% 수준이죠? 나쁘지 않은 겁니다. 그것은 어마어마한 베네핏이에요. 그리고 적어도 그만큼의 두뇌와 능력을 갖고 있다는 얘깁니다. 그런 사람들은 좋은 기회가 많고, 재미난 기회가 많습니다. 여러분들은 재밌게 살아요. 여러분들 말고 99%의 어마어마하게 많은 젊은이들이 힘들게 살 수도 있지만, 여러분들은 재밌게 삽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힘들겠죠. 하지만 그건 힘들다고 얘기할 게 아니야. 삶이 그냥 그런 거야. 여러분들은 훨씬 좋은 환경에서 훨씬 유리하게 사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사회가 삭막하다고 생각하는 거는, 다른 사람들한테 미안한 거야."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저씨들 얘기가 대체로 이렇죠? 그런데 그게 사실이기도 합니다. 공부하는 쉽지는 않죠. 쉽지 않습니다... 쉬운 게 어딨어? 그래도 해보면, 나름 할만하기도 할 거예요."


 첫 수업이 끝나고, 지훈은 작은 도서관의 한 자리에 앉았다. 교수님이 그에게 건네준 그 사실에 조금, 어쩌면 많이 놀랐다.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어서 느끼는 놀라움은 아니었다. 그 사실은 분명 그의 몸속에 존재했다. 그런데 머릿속은 아니고, 저기 무릎 근처에 있었던 느낌. 분명히 어딘가에 있었지만, 쉽게 꺼낼 수 없는 사실을 과감하게 꺼내고, 심지어 그걸 눈앞으로 가져다주었다. 양팔저울이 한쪽으로 기울어질 것 같으면서도,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는 듯한 기묘한 균형감도 여전히 느껴졌다. 이런 경험은 꽤나 오랜만에 하는 경험이었기에 지훈은 이 느낌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었다. 그는 가방에서 소설집을 꺼냈다. 그 책의 제목은 <비행운>이었다. (下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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