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초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읽고 든 생각.
경계가 없는 우주란 불확정성을 가진 우주다. 즉, 무한한 가능성의 우주이자 정해진 것이 없어 불안함과 기대감을 동시에 유발하는 특성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경계 없음' 때문에 인간은 우주의 ‘경계 없음'을 인식하게 되는 데 수많은 시간이 걸렸다. 광활한 경계 없는 우주에 살면서 우주가 무한하다는 사실을 깨달은지, 우주달력에 따르면 불과 몇 초 전도 안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무한함은 정해진 것이 없기 때문에 정해진 것이 없는 것 속에서 만들어진 인위적인 것을 빠져 나오는 데 어려움을 준다. 완전한 관점의 변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무한함 속에서 길을 잃거나, 갇히거나, 완전히 새로운 것을 발견하거나, 이러한 극단의 지점 속에 놓여져 있다. 우주의 ‘경계 없음'은 이토록 인간을 헤매도록 하지만, ‘인간에게 유한한 우주가 필요한 것인가?’라는 물음에 우리는 정확히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주의 ‘경계 없음'을 사랑해야 한다.
우주의 ‘경계 없음'이 주는 무한함의 매력은 인간에게 엄청난 동력을 준다. 무한한 우주로 더더욱 인간 또한 외연을 확장하기를 바라고 이는 기술을 발전으로 실현된다. 인간은 끝이 없는 우주의 ‘경계 없음'의 발끝이라도 따라가고자 우주를 향한 끊임 없는 상상을 통해 우주와 가까워지고자 한다. 하지만, 무한한 우주가 인간의 물리적인 개념인 ‘가까워진다.’ 로 설명될 수 있는 공간일까? 우주로의 진출이 눈앞이다, 지구가 아닌 우주가 인간의 무대가 된다는 등의 프레임은 우주 입장에서 보면 먼지날림보다도 사소한 일일 수도 있다. 우주의 ‘경계 없음'과 ‘무한함'은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없다는 점을 직시하게 해준다. 우주의 무한함 자체가 우주에 완벽한 것은없다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태양도, 지구도, 우리 은하도, 국부은하계도 모두 수명이 있다. 우주 속 모든 것은 불완전하고 영원하지 않고 이 영원하지 않음이 우주를 무한히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증거가 된다. 무한한 공간이기에 유한한 것들의 무한한 생성과 소멸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우리 인간은 영원하고 완벽한 공상의 신의 삶보다 불완전하게 성장하고 변화하는 인간의 삶에서 가치를 찾을 수 있게 된다. 유한한 생명 속에서 우주의 무한함을 느끼며 그 불완전함 속에서 선택하고결정할 수 있을만큼 자유로운 작고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즉, 무한한 공간을 가진 경계 없는 우주는 인간에게 이미 만들어진 완전한 세계가 아니라 앞으로 만들어가야할 불완전한 세계라는 무한한 과제를 부여한다. 경계 없는 우주에서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존속하는 동안, 모두 자주 불행하고, 자주 행복하며, 영원히 답이 없는 과제를 떠안고 서로를 사랑하며 살아갈 것이다. 경계 없는 우주가 인간에게 인간다움을 부여하는 셈이다.
경계 없는 우주는 불확정성을 가진 우주다. 유한하고 정적인 우주라는 믿음을 넘어 무한한 우주, 불확정성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라는 점을 깨달은지 얼마 되지 않았다. 토마스쿤이 말하는 패러다임의 변화가 끊임 없이 필요하듯, 우주는 하나의 점에서 빅뱅이라는 폭발로 시작되었고, 지금도 팽창하고 있는 중이라는 현재의 믿음이 미래의 언젠가 버려질 가능성도 우리는 배제할 수 없다. 경계 없는 우주에서는 어느 하나도 100% 확신할 수 없다. 마치 아리스토텔레스의 믿음이 17세기가 되어서야 깨어진 것처럼 먼 미래 어느 순간에는 빅뱅이론을 뒤엎을 또다른 이론이 나올지 모르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 미래 어느 순간을 어느 정도의 확률로 점쳐볼 수 있는 이유 역시, 경계 없는 우주의 특성에서 온다. 실제로 무한한 우주일지, 유한하지만 관측되지 않은 우주일지 모르겠으나 아직까지 유한하다는 명확한 증거를 인류가 발견해내지 못하는 이상, 우리는 우주의 경계없음에서 비롯되는 불확정성과 무한함을 긍정하고 성장의 발판으로 삼을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경계 없는 우주에서 허우적대며 살아가는 이 인류는, 어떤 연유로 우주에 존재하게 되었을까. 인류는 우주에 존재하는 최고의 지적 생명체일까? 우주의 푸른 별, 이 특별한 별 (엄밀히 말하면 행성)인 지구에서 인류와 같은 지적 생명체가 살게 된 것은 필연일까, 우연일까. 지구가 존재하기 시작한지 약 45억년이 지났고, 동물이 등장한 지는 7억년, 인간이 등장한지는 이제 수백만년이 지났다. 지구에 생물이 존재하게 되고 나름의 쾌적한 삶을 영위해나가기 시작하게 된 것은 우연인지 필연인지 판단하기 힘드나, 지적생명체인 인류의 등장은 필연적일 수 있다는 주장을 하고 싶다. 즉, 지구에서의 생명이 동물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지적 판단이 가능한 인류로 발전한 것이 필연적이라 주장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미디어학자 마셜 맥루언은 ‘미디어는 메시지다.’ 라는 캐치프라이즈에 이어 오타를 승화한 ‘미디어는 마사지다.’를 통해 모든 테크놀로지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몸의 확장이라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더해 심리학자 앤디 클라크는 ‘확장된 마음' 이론을 통해 테크놀로지에 의해 인간의 마음도 확장될 수 있음을 주장한다. 클라크에 따르면 기술을 통해 인간은 신체 뿐만 아니라 정신도 확장시킨다. 마치, 아이패드로 생각을 스케치와 메모로 옮기고, 구글로 정보를 검색하는 기술들은 모두 정신, 마음을 기술틀 통해 외연화하는 과정인 것 처럼 말이다. 잠시, 현대 미디어 사회로 눈을 돌려봤다. 이제 다시 태초로 돌아가자. 인간이 현대에도 이렇게 외부의 것들을 연결시켜 감각기관과 정신기관을 확장하며 표현의 스펙트럼과 기억공간의 무한한 확장을 시도해가고 있다면, 동물로부터 시작된 우리 인류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무한한 우주에서 더 ‘확장'되고픈 마음을 좇아 지적인 생명체로 거듭나지 않았을까 하는 재밌는 상상을 해본다. 그리하여 지적인 인류의 등장은 어떠한 요소의 우연한 결합이나 생존하기 좋은 지구의 우연히 맞아 떨어진 살기 좋은 유기체의 등장이 아니라 무한한 우주에서 확장의 DNA의 등장이라면, 우연에 가까운 필연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스마트폰을 제 2의 기억장치로 활용하듯, 단단한 팔에 대한 욕심이 뗀석기를 만들고, 유한한 기억의 확장에 대한 욕구가 벽화의 기록을 시작하는 것으로 발현되었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