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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in Oct 26. 2022

자신을 소진하여 세계관을 짓는 마음

흐르고 헤매는 사람들에게

올해는 나에게도 생애 처음으로 '사수'라고 부를 사람이 생겼다. 왠지 '사수'라고 하면 오피스 드라마에서만 들어봤던 단어라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지만, 나의 사수는 그런 점과는 많이 떨어져 있는 분이었다. 차장님은 광고계에서의 경력이 10년 즈음 되는 분이었다. 스스로를 떠돌이라고 칭할 만큼, 이직도 많이 해왔다고 했다. 했던 일들도 다양하다. AE, 아트디렉터, 카피라이터, 그리고 지금은 디지털 PR까지. 회사에서의 위치도 다양했다고 했다. 팀장과 단둘이 일하는 인턴, 혹은 인턴보다 어린 대리. 다양한 굴곡을 지내온 사람이었다. 

자신의 열정으로 인한 내면의 힘듦을 바라보다가 퇴근 후에는 심리 치료를 공부하는 일상을 살고 있는 분이었다. 그리고, 내가 퇴사한 지 한달즈음이 지났을 때 이번에는 현재 한국에서 메타버스와 실감콘텐츠 제작사로 가장 유명한 회사로 이직하셨다. 회사를 다닐 때도 줄곧 세계관 기획에 대해서 이야기 하셨는데, 말하면서 그것을 올해 실천하신 것이다. 

나는 헤매고 흐르는 사람들이 애틋하다. 헤매고 흐르는 사람들은, 실현이 다짐과 가깝다. 그들은 자신을 너무 사랑한 것이다. 이대로 내가 지금 이 순간에는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시간이 너무 소중해서 먼 미래를 위해 지금을 버려둘 수는 없다는 걸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이니까. 삶에 대한 진득한 애정이 너무나도 느껴진다. 그 사람들의 공통점은, 그렇게 하기 위해 수많은 불안의 시간을 견뎌왔다는 것이다. 보편적이고 평범한 것의 감수성은 그들에게 항상 돌을 던질테니까. 하지만 그 불안 속에서도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를 찾을 수 없어서 계속해서 냇물에 자신의 작은 돌멩이를 던져 작은 파동을 만들어낸다. 누가 보지 않아도, 아직은 영향력이 작아도, 스스로가 가진 삶의 애정이 똘똘 잘 뭉친 무언가를 만들어 계속 세상에 내던진다. 

내가 퇴사를 하고, 여러 돌멩이를 만들고. 차장님이 이직을 하고, 그 돌멩이들을 수확했을 때. 연말에 만나뵈어 이야기를 나눴다. 여러모로 나와 비슷한 어른이다라는 생각을 해왔었다. 나는 퇴사할 때 다음 학기는 어떻게 보낼거냐는 팀원분들의 말에 호기롭게 선언했었다. ' 휴학 한학기 더 하면서, 저한테만 있는 경험들을 짓고 싶어요! ' 그때의 나는 확신이 있었다. 내가 무언갈 만드는 사람이 되려면, 나에게만 있는 무언가가, 비밀병기가 있어야 했다. 누군가에겐 세계 여행 같은 그런 경험 말이다. 그리고 난 돌아갈 계획이 뚜렷했다. 내 고유의 경험을 자양분 삼아 영향력있는 바운더리에서 일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포부가 있었다. 그렇게 호기로웠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돌멩이들을 만드는 순간 생각보다 나는 많이 흔들렸다. 

생각보다 모험과 헤매기, 흐르기는 계속해서 나를 곧게 세우곤 했다. 헤매는 건, 나 자신을 내가 지키는 일이었다. 실은, 타인에게 내가 반년동안 한 일을 설명하기가 민망했다. 너무 많은 것들을 중구난방하게 하기도 했고, 누군가가 보기에는 '그래서 뭘 한건데?' 라는 반응이 나와도 무관할 정도로 정리가 안된 것들도 많기 때문이다. 내가 한 것들을 아끼지 않고, 부끄럽게 보는 것도 절대 아니지만 지금 되돌아보니 그냥 사람들의 반응이 무서웠던 것 같다. 대놓고 헤매겠다는 건 누군가에게 한심해보일 수도 있으니까. 

차장님은, 안본 반년 새 어떻게 헤맸는지 궁금하다고 물어봐주셨다. 어떤 도전들을 했냐고. 정리가 잘 안되지만 이러이러한 것들을 했다고 설명하고 반응이 좋으니 들떠서 여러가지를 실제로 보여드렸다. 아무도 관심가져주지 않을, 물에 깔릴 돌멩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갑자기 보석처럼 보이는 순간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말씀드렸다. 헤매고 다시 돌아가서 헤매며 얻은 것들을 재료로 삼으려 했는데, 새로운 진로들이 갑자기 튀어나와 당황스러워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요. 어떤 걸 가장 먼저 커리어로 잡아야할지 모르겠어요. 실은, 이제 앞으로 제가 일할 세계가 어느 하나를 정해야할 곳은 아닌 것 같아요. 저.. 무엇이든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또, 좋게 말하면 다양한 걸 한 건데, 다르게 보면 중구난방인 것 같아요. 그리고 생각해보면 제가 '창작'한 것 없더라고요. 모두 그냥 내 이야기를 쏟아냈어요. 남들을 매료시킬 가상의 스토리나 로직이 완벽한 기획들을 만들어내고 싶은데 너무 개인적인 것 같기도 하고요. 

이런 대화 이후에 키워드는 노마드와 커뮤니티였다. 메타버스와 웹3, nft, 콘텐츠세계와 더불어 헤매는 것, 삶의 태도에 대한 주제가 믹스된 오묘한 대화였지만, 서로 공유하는 사고가 겹쳐서 굉장히 마음이 가득차는 대화였다. 그 중에 이런 말씀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조금 민망하지만 내 이야기를 듣고선, 아이유가 생각난다고 했다. 주말 내내 아이유의 노래를 몰아듣고, 그가 앨범 설명에 남긴 코멘트들을 한번에 읽어보셨다고 했다. 사람들이 현실의 내면이 부족해서 자꾸만 메타버스라는 또다른 세계를 만들어서 가상의 세계관을, 스토리텔링을 만들려고 하는 이 시대에. 아이유라는 아티스트는 공고하게 자신 스스로를 세계관으로 만들어온 것 같다고. 스무살부터 서른살까지, 그 나이에만 할 수 있는 솔직한 고민과 생각을 10년에 걸친 서사로 모든 이를 매료시키는, 세계관을 기획하는 자신이 보기에는 이보다 더 완벽한 세계관 스토리텔링은 없다고 말이다. 그런 아이유가 스무살에 서른살이 되기 전 ' 내 삶엔 아무 의문이 없어요 ' 라는 가사를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 스스로 예상이나 했을까? 그녀도 스물 셋은 아무것도 모르겠고 아무거나 되고 싶었다. 부단히 모든 나이에 자신을 소진한 것들을 남기다 보면 그 자체로 내 자신이 브랜드가 되는 날이 올 거라고 얘기해주셨다. 

그러니, 스스로를 소진하여 무언갈 계속 세상에 내보인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 해주셨다. 다른 것에 기대어 남을 위한 세계관을 만드는 일보다 더 힘들고 대단한 일이라고. 반년을 이렇게 살아봤으니, 나중에 회사를 다니면서도 노마드처럼 열심히 헤매면서 수민이라는 브랜드를 만들어갈 것 같아서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전혀 고민이 아닌 것 같다고. (물론 회사를 안가도) 헤맨다는 것 자체로 너무나 멋진 일이고, 멈춰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디론가 언젠간 도착해있을 거라고! 

주변에 고민을 깊게하고 판단과 다짐은 낙관적으로 마무리하는 모험하는 어른들이 많이 생겼다. 그래서, 나도 이제 아무 의문이 없다. 아니, 의문은 항상 있을 것이지만 그 의문 끝엔 항상 옅은 웃음이 함께 하길. 

내가 만든 내 세계관은 혼자있지 않을 것이다. 난 계속해서 엔딩이 없는 게임을 이어나갈 것이고, 계속해서 이렇게 의문에 답을 구할 사람을 찾을테니까! 

그리고 치열하게 현재의 감정들을 남기고, 원천 삼아 많은 흔적들을 남겨 놓을 것이다. 다른 플레이어가 나와 비슷한 세계관을 지을 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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