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을 맞아 아내와 함께 덕수궁을 찾았다. 얼마 전, 아내와 나눈 대화에서 일제 강점기의 역사와 그 시대의 사회상에 관해 이야기하던 중, 조선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마지막 궁궐, 덕수궁을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 살면서도 덕수궁은 흔히 지나치는 곳 중 하나였고, 집에서 삼십 분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음에도 발길이 쉽게 닿지 않았다. 이번엔 마음을 다잡고 덕수궁을 직접 찾아보기로 한 것이다.
덕수궁의 입구인 대한문에 도착하니, 가을의 기운이 서서히 느껴졌다. 한여름의 무더위는 잦아들고, 솔솔 부는 가을바람이 덕수궁의 고즈넉한 풍경과 어우러졌다. 이곳에서는 하루에 세 번 수문장 교대 의식이 재현된다고 하는데, 우리가 도착한 시간과 맞지 않아 아쉽게도 이 장면을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교대 의식을 못 본 아쉬움은 어느새 덕수궁의 조용한 분위기에 속에 사라져 버렸다. 아이의 손을 잡고 걷는 가족들, 나이 든 노부부, 외국인 여행객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한 연인들 등 덕수궁을 찾은 많은 사람들은 이 작은 궁궐의 자태에 감탄하며 조용히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덕수궁의 역사는 무척이나 오래되었다. 1471년에 처음 세워졌던 이곳은 본래 왕가의 별궁으로 쓰였던 명례궁이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후에는 임시로 왕이 머무는 행궁 역할을 했고, 광해군 때 정식 궁궐로 승격되어 경운궁이 되었다. 이후 대한제국 시대에는 황궁으로 쓰였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덕수궁이라는 이름은 1907년 고종 황제가 퇴위한 후 순종이 즉위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고종에게서 왕위를 물려받은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고종에게 장수를 비는 뜻으로 ‘덕수’라는 궁호를 올린 것이 그대로 오늘날 덕수궁의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고종 황제가 경운궁, 즉 덕수궁에 애착을 가진 이유는 단순히 궁의 아름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고 한다. 덕수궁은 러시아공사관, 미국공사관, 영국공사관 등 외국 공사관들과 가까워, 일본의 무력 도발이 어려운 위치에 있었다. 그 때문인지 고종은 외국의 눈이 닿는 이곳을 비교적 안전한 피신처로 삼았다고 한다. 고종이 내세운 덕수궁의 역할은 단순히 궁궐의 기능을 넘어선 정치적 요충지였던 셈이다.
덕수궁은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으면서많은 수난을 당했다. 현재 남아 있는 덕수궁의 면적은 대한제국 시절의 삼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일제는 덕수궁의 건물들을 대거 철거했고, 당시 경성에 공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이곳을 공원화하며 일부 권역을 민간에 매각하기도 했다. 덕수궁의 원래 모습이 많이 사라진 것은 그때부터였다.
전쟁 중에도 덕수궁은 위태로운 순간을 맞았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 북한군이 덕수궁 안으로 숨어드는 바람에 미군의 포격 대상이 될 뻔한 적도 있었다. 당시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군을 밀어붙여 서울로 진격하던 미군은 남산과 덕수궁 일대를 사정거리에 두게 되었는데 북한군이 덕수궁으로 숨는 바람에 미군은 덕수궁을 포격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당시 미군 포병장교였던 제임스 해밀턴 딜 중위는 한국의 문화유산인 덕수궁을 파괴하는 것은 양심에 걸린다며 고민 끝에 북한군이 덕수궁에서 빠져나가 을지로로 향할 때 포격을 개시했다고 한다. 덕수궁이 잿더미로 변할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덕수궁의 돌담길도 마찬가지로 수난을 겪었다. 1960년대 초반에는 돌담이 헐리고 대신 창살담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태평로의 확장 공사로 인해 덕수궁의 상징적인 문, 대한문이 도로 위에 고립되었고, 결국 서쪽으로 옮겨야만 했다. 덕수궁이 갖고 있는 역사적 무게감이 이처럼 크지만, 이곳은 여러 변화를 거치며 제 모습을 잃어갔다.
그러했던 덕수궁이 1980년대부터 조금씩 복원되기 시작했다. 돌담 복원을 통해 옛 모습을 되찾아가며, 현재도 복원 과정이 계속 진행 중이라고 한다. 하지만 덕수궁이 원래 모습으로 완벽히 돌아가는 것은 쉽지 않은 것 같다. 일부 권역은 여전히 민간 소유로 남아 있고, 복원 작업에도 다양한 문제가 산재해 있어, 옛 덕수궁을 완전하게 되찾기까지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고 한다. 그럼에도 덕수궁이 우리에게 갖는 역사적, 문화적 의미는 여전히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덕수궁은 현대 한국인들에게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곳이다. 이곳은 일본 제국의 침략과 식민지화를 겪으며 근대사의 비극을 상징하는 동시에, 한국 전통 건축과 서양식 건축이 공존하는 독특한 공간이다. 중화전과 같은 전통적인 건축물들은 조선의 궁궐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반면, 석조전과 같은 서양식 건축물은 대한제국 시절 서구 문화를 받아들이려 했던 고종의 의지를 상징한다. 이 같은 건축물의 혼합은 한국 근대화의 과정과 서구 문물의 수용을 잘 보여주며, 이곳이 단순한 궁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살아있는 역사서임을 증명한다.
덕수궁은 역사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현대인들에게 중요한 휴식처로 자리 잡고 있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자리한 덕수궁은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여유를 누릴 수 있는 공간이다.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산책하며 조용한 시간을 보낼 수 있고, 궁 내부를 돌아보며 우리의 역사를 가까이서 접할 수 있다. 또한 덕수궁은 전통과 현대가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 덕수궁에서 열리는 각종 문화 행사와 공연, 전시 등은 과거의 역사를 오늘날의 문화와 연결해 주며 한국인들에게 전통의 중요성과 가치를 되새기게 해 준다.
덕수궁에서의 하루는 내게 단순한 나들이 그 이상의 의미를 남겼다. 덕수궁의 건축물 하나하나에 깃든 역사의 무게를 느끼며, 우리의 과거가 얼마나 힘겨웠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덕수궁은 한국의 근대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장소이며, 그 안에 담긴 아픔과 회복의 역사를 상징한다. 우리는 그곳에서 한때 이 나라를 지키려 했던 사람들의 숨결을 느끼며, 과거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현재와 어떻게 이어지는지, 덕수궁의 숨결 속에서 깊이 깨닫게 되었다. 우리에게 덕수궁이 있어 행복하다는 것을 느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