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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절필동 Dec 18. 2023

처음으로…

감옥에서 당신에게 보내는 첫 편지

이제야 펜과 종이가 생겨서 낯선 곳에서 처음으로 편지를 보냅니다.



당신에게 감옥에서 보내는 첫 편지는

당신이 처음으로 받아보는 감옥에서 온 편지입니다.


당신이 기다리는 처음 소식이 무엇이어야 할지를 정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이곳에서 보내온 며칠보다 더 힘이 듭니다.


처음 보는 것, 

처음 듣는 것, 

처음으로 느끼는 순간, 순간의 모든 것들이 글자들로 떠돕니다.

난독증에 걸린 환자 같습니다.

글로 남겨놓지 않으면 언젠가는 단지 한두 마디로 오늘을 기억할 뿐일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화장지에 서너 개의 단어들만 적고 뭉쳐서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습니다.


오늘 다섯 개의 뭉치들을 풀었습니다.




처음으로 한 일은 옷을 다 벗었습니다. 내 손으로 벗었지만 벗겨진 겁니다.

알몸이 되는 일이 처음은 아닙니다.

옷을 입은 남자들 앞에서 혼자서만 옷을 다 벗고 CCTV 앞에 섰던 일이 처음입니다.

옷을 벗기 전에 윗도리와 아랫도리 주머니에서 있는 것들을 모두 꺼내 주었습니다. 소중해서 몸속에 감추어 왔던 것들입니다.

밖에서 소중했던 것들이 안에서는 무용(無用)입니다.

신용카드 결제가 안 되는 곳입니다. 자동차 키와 핸드폰 그리고 아직 반도 채 비우지 않은 담뱃갑도 내놓았습니다.


알몸 하나 보여주고 새 옷을 거저 받았습니다. 겉옷이 새 옷은 아닙니다.

갈아입은 새 옷은 유니폼입니다. 단체복입니다.

내가 없어지는 투명망토 같은 옷입니다. 나를 숨기는 옷이기도 합니다.



몇 번의 철커덩 소리를 거쳐 긴 통로와 좁은 복도를 걸었습니다.

감옥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방과 후 비어 있는 불 꺼진 교실 복도의 음산한 기운보다 차가웠습니다.

잠긴 철문들이 양쪽으로 나목(裸木)의 가로수처럼 똑같은 크기와 모양, 같은 거리에 박혀 있습니다.


그 안에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안 것은 하루가 지나서였습니다.




매일 영화를 찍는 것 같기도 하고 소설을 쓰는 것 같기도 합니다. 내가 주인공으로 나옵니다.


어제, 오늘 있었던 그리고 내일 있을 일들입니다.


아침 6시 30분 기상

7시 아침 식사

8시 점검

9시 30분간 운동

11시 30분 점심

오후 5시 30분 저녁

9시 취침

다음 날,

아침 6시 30분 기상

7시 아침 식사

8시 점검

9시 30분간 운동

...


감옥에도 TV가 있습니다. 작은 모니터입니다.

오전에는 인간극장, 한국기행, 오후에는 모르는 드라마 녹화분, 오락 프로, 저녁 뉴스, 드라마 등으로 아침부터 저녁잠 들 때까지 TV가 켜져 있습니다. 주말에는 영화도 틀어줍니다.


아침 첫 TV 방송은 아침체조로 시작합니다.


특이한 것은 앉아서 하는 몸풀기 체조 내용입니다.


시청자 모두가 앉아 있는 것을 아는 것이겠지요.



모든 게 같아 보이면 멈추어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매일 조금씩 바뀌는 식단의 메뉴만으로도 삶의 변화를 감지해내려고 합니다.

같아 보이는 반복의 멈춤을 지우려고 합니다.


요일마다 같은 반찬이라도 끼니마다  양과 색깔에서도 다른 것을 보려고 합니다.

매일 나오는 인간극장 어제 본 인물이 오늘 하는 일은 어제와 다릅니다.

어제 본 한국기행의 길이 오늘은 다른 길입니다.

매일 같은 시간 나오는 뉴스의 반복되는 사건, 사고는 어제와 다른 사건, 사고 뉴(new)스입니다.     


나는 아침 기상해서 저녁 잘 때까지 계속 읽고, 쓰고 있습니다.


나의 반복도 어제와 다른 글들입니다.


지금은 내 책들이 없으니, 인쇄된 글자들만 있으면 어느 것이든 읽습니다.



처음으로 겪는 일들입니다.

당신도 처음 겪는 일들임을 모르지 않습니다.


처음으로 감옥에서 남편이 보내는 편지를,

당신이 처음으로 받게 될 것을 아는 게 힘이 듭니다.


내일 또 다른 처음 있을 일들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오늘 처음 겪은 일은 내일부터는 처음이 아닙니다.


오늘 힘든 처음이 내일은 힘들지 않을 자양(滋養)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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