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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절필동 Jan 05. 2025

죄와 벌

심사과에서 들고 온 4권의 책, <신곡>, <데카메론>, <셰익스피어 4대비극> 그리고 <죄와 벌>을 두고 읽는 순서를 잡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우선 빌려 온 것이라서 읽고 있던 책들은 옆으로 밀어 두었습니다.

나름 순서를 잡은 것은 나의 오랜 산행의 순서였습니다.

입산은 길게, 하산은 짧게 잡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먼저 <신곡>을 들었던 겁니다.

다음은 단테를 이었던 보카치오였기에 <데카메론>을 잡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름과 제목으로만 알았던 것을 여기오니 끝까지 다 읽게 됩니다.

14세기 피렌체에서의 EDPS일 줄은 몰랐습니다.

야한 빨간 책은 아닙니다.

나는 다만 어느 훗날 나만의 <데카메론-프로젝트>를 꿈꿉니다.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어느 멋진 별장에서 정기적으로 모여 서로의 진솔한 이야기들을 풀어내는 그런 날들을 떠올리면 입꼬리가 올라갑니다.



독서의 순서가 어려웠던 것은 <죄와 벌> 때문이었습니다.

여기 들어와서 제일 먼저 생각났던 책이었지만, 선뜻 주문하는 데는 주저했습니다.

‘죄와 ( )’ 빈칸에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을 적으라고 한다면 누구나 쉽게 ‘벌’이라고 할 것 같습니다.

언제부턴가 이 두 단어의 조합을 수용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나는 다른 단어를 선점하고 있었지요. ‘용서’입니다.


기독교에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사랑’ 일 겁니다.

그리고 사랑은 용서의 앞말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이유가 세상을 ‘사랑’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는 간판이 교회마다 가장 많이 내걸리곤 합니다.

교인들은 저마다 ‘죄인’이라고 하고, 십자가는 곧 속죄와 구원으로 연결합니다.

죄인이 용서를 구하는 것은 심판/벌을 면하는 구원에 기대는 것입니다.

지옥이 벌이라면, 천국은 용서와 구원입니다.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한다지만 죄인인 남을 사랑한다는 교인들을 보는 건 쉽지 않습니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가장 대립시켜 대치한 말이 율법과 복음입니다.

율법은 심판이고 복음은 구원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죄에 대한 심판이 없이, 용서와 사랑으로만 대체된다면, 과연 죄 없는 세상이 구현될까요?

오히려 죄가 더 번창할지도 모릅니다.

‘싸구려 은혜’를 받는/으려는 교인들이 많아 보입니다.


이청준의 <벌레이야기>를 각색한 영화 <밀양>의 물음은,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먼저 용서할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는 ‘거짓말이야’가 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요점은 ‘신의 축복’을 기대기보다는, ‘신의 심판’을 내다보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용서를 구하는 죄인의 간절함은 신의 심판을 알고 있어서입니다.

신의 용서가 인간의 죄에 대한 신의 심판을 거둔다면, 신의 법은 ‘거짓말’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할 이유가 사라집니다.

죄에 대한 심판은 당연한 결과가 되어야 범죄의 예방입니다.

그것이 법이고, 구약의 율법입니다.

그러면 용서를 구할 자리가 없는 것일까요?

신의 사랑이 설 자리는 없는 게 아닐까요?

죄에 대한 심판과 용서와 사랑은 어느 하나 버릴 수는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언제 어떻게 그들이 서로 맺어지는지를 연산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율법 없이 용서와 사랑은 가능하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니 예수는 ‘율법을 폐하러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심판을 폐하는 게 아닙니다.

심판은 사랑을 피하는 벌이 되지 못하고, 용서는 심판을 건너뛰지 못한다는 생각입니다.


용서 앞에 오는 것이 있습니다.

참회입니다.

회개 없이 용서가 혼자 나서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참회는 벌을 피하는 데 있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니코프가 아니라, 소냐의 아버지 술주정뱅이 마르멜라도프의 말 때문입니다.

“…. 그래 조금도 불쌍히 생각할 건 없지. 나 같은 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할 인간이야. 형틀에 못 박혀 죽여야 마땅하지. 가엽게 여겨서는 안 돼! 그러나 재판관이여, 형틀에 못 박는 것은 좋으나 못 박은 다음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그렇다면 나 스스로 못 박히러 찾아가리라. 지금 내가 바라는 것은 쾌락이 아니라 깊은 슬픔의 눈물이니까. 이봐요, 주인, 당신은 내가 이 술병으로 인해 즐거웠는 줄 아시오? 나는 술병의 밑바닥에서 슬픔을, 슬픔과 눈물을 구한 거야! 그러나 하나님은 온 백성을 긍휼히 여기신다….”


“술병 밑바닥에서 슬픔을 구했다”는 마르멜라도프. 그의 고백은 깊은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내면의 울부짖음처럼 들렸습니다.

참회라는 말은 그에게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자신의 추악함을 벗어던지는 고통의 몸부림이었지요.

마르멜라도프는 철저히 무너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비참한 현실에서 자신을 돌이킬 힘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외친 한 마디는 다르게 들렸습니다.

“나를 형틀에 못 박아라. 그리고 나를 불쌍히 여기라.”

형벌을 요구하면서도 자비를 구하는 이 이중성은 인간 본연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는 죄를 짓고도 용서를 갈망하며, 심판을 두려워하면서도 사랑을 찾습니다.


감옥에서 바라본 노란 민들레가 떠올랐습니다.

아무 데서나 피고 아무렇게나 사라지는 그 꽃이 왜 그토록 소중해졌는지요.

그것은 나의 나약함과 소멸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없어도 세상은 돌아가고, 나의 흔적은 별것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용서와 사랑이 나에게 다시 피어날 가능성을 건네주었지요.


마르멜라도프가 구한 것은 술이 아니라 눈물이었고, 자신을 둘러싼 심판의 칼날에서 사랑의 불빛을 보려는 몸부림이었습니다.

그의 고백이 빛난 것은 술병 밑바닥이 아니라, 그곳에서 솟아오른 희미한 빛 때문이었습니다.

참회는 어둠의 가장 깊은 곳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용서는 심판을 통과해 빛이 되며, 사랑은 바로 그곳에서 다시 태어납니다.

마르멜라도프가 마지막으로 외친 것은 사랑의 시작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온 백성을 긍휼히 여기신다”라고 믿었던 그의 고백은, 비참함 속에서도 빛나는 생명의 선언으로 들립니다. 그 빛 속에서 나의 죄를 비춰보려고 합니다.


어둠은 죄와 연약함을 삼키지만, 그 바닥에서 비로소 참된 빛을 봅니다.


참회란 어둠 속에서 자신을 마주하는 일이고,

용서는 빛 속으로 걸어 나가는 길이며,

사랑은 다시 피어날 가능성을 믿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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