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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작가야 Feb 04. 2024

성장통

인생의 베일_서머싯 몸

들어가며


고전은 재미없다는 편견을 가진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랑 이야기는 재밌다. 특히 부정을 저지른 여주인공이라니. 고전은 세상을 관통하는 진리, 모름지기 좋은 내용만 다뤄서 따분할 것 같다는 고정관념을 깨부쉈다. 독서가 물린다거나, 고전은 어렵다고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꼭 읽어봤으면 좋겠다.


마음에 드는 구절

“나는 당신에 대한 환상이 없어. 나는 당신이 어리석고 경박한 데다 머리가 텅 비었다는 걸 알고 있었어. 하지만 당신을 사랑했어. 당신의 이상이 쓸데없고 진부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당신을 사랑했어. 당신이 이류라는 것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당신을 사랑했어. (중략) 당신이 지성에 얼마나 겁을 먹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도 당신이 아는 다른 남자들처럼 당신에게 바보처럼 보이려고 별 짓을 다했어. 당신이 나와 결혼한 건 편해지기 위해서라는 걸 아니까. 그래도 나는 당신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개의치 않았어.“(하략)
“타운센드 부인이 그녀의 남편과 이혼하겠다는 확답을 내게 주고, 법원으로부터 두 사람의 이혼 확정 명령이 내려지고 나서 일주일 안에 그가 당신과 결혼하겠다고 내게 서면 동의를 한다면 그렇게 해주지.”
“내 아내와 이혼하라고 요구한다면, 그리고 당신과 결혼함으로써 내 행적에 흠집을 내라고 한다면, 그건 무리한 요구야.”
“위험하단 말이야. 이건 미친 짓이야. 자살 행위라고.”
“그래서 먹는 거예요.”
그는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취급했는지 알면서도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에 개의치 않았다. 이제 그녀는 그를 혐오하지도 분노를 느끼지도 않았지만 약간의 두려움과 당혹감을 느꼈다. (중략) 그래도 그는 그를 사랑할 수 없었고, 무가치한 무가치한 인간임이 명백하게 밝혀진 다른 남자를 여전히 사랑한다는 사실이 이상할 따름이었다.
“알겠지만, 평화는 일이나 쾌락, 이 세상이나 수녀원이 아닌 자신의 영혼 속에서만 찾을 수 있답니다.”
그녀는 다른 친구들도 각자의 가슴에 수치스러운 비밀을 품고서 호기심 어린 시선들을 피해 평생을 살아가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며


키티는 어머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사교게에 등장했다. 아리따운 미모 덕분에 많은 구애를 받았지만, 마음에 드는 짝은 쉽사리 찾지 못했다. 그러다 여동생의 결혼 날짜가 정해지자, 마음이 급해진 키티는 그 당시 곁에 있던 윌터와 결혼을 결심했다. 적당한 호기심으로, 그렇지만 애정은 없는 채로 평생을 약속했다. 결혼 후에 키티는 윌터와 함께 홍콩으로 이동했다. 찰스 타운센즈를 만나 불꽃같은 사랑을 했고, 결국 그들의 부정은 곧 수면 위로 드러났다. 이내 키티는 남편 윌터에 이끌려 콜레라가 창궐한 중국으로 가게 된다.


사교계 데뷔탕트, 결혼, 그리고 불륜으로 이어지는 맥락이 흥미로웠다. 빠르게 읽었으나 오히려 책을 덮은 뒤 생각할 거리가 많았다. 우선, 여성성의 변모 엿볼 수 있었다. 키티는 결혼을 도피처로 생각했다. 1920년대 시대상을 고려했을 때, 순종적이고 유약한 여성인 그녀에게 독립을 위해서는 결혼이 필수조건이었다. 사랑의 유무는 관계없었다. 키티는 이성과 별개로 놀던 감성을 이기지 못했고, 육신의 욕망에 따라 찰스와 부정한 관계를 맺었다. 이후 키티는 친정으로 돌아와 아버지께 이런 말을 했다.


"난 딸이었으면 좋겠어요. 내가 범한 실수를 그 애가 저지르지 않도록 잘 키우고 싶기 때문이에요. 어릴 적 제 모습을 돌이켜보면 제 자신이 싫어요. 난 그 아이를 세상에 던져놓고는 사랑한답시고 결국 어떤 남자와 잠자리를 갖기 위한 여자로 키우기 위해 평생토록 입히고 먹일 생각은 없어요.”


이 대목을 통해 자신의 삶에 대해, 그리고 여성의 인생에 대한 그녀의 생각이 많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었다.


다음으로, 사랑의 속성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었. 키티는 수녀원에 봉사를 다녔다. 뇌수종을 앓고 있던 6살 여아가 키티를 쫓아다닐 때 키티는 불쾌함을 감추지 못했다. 어린아이가 자신의 품을 애타게 원하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쉽게 곁을 내주지 않았지만, 이내 원장 수녀의 말을 듣고 생각을 고쳐 먹었다. 용기를 내어 키티가 어린아이의 민둥 머리를 쓰다듬자, 이상하게도 그때부터 그 아이는 키티에게 알은체 조차 하지 않았다. 우리가 외사랑을 하는 사람에게, 단지 내게 애정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얼마나 괴팍하게 굴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끔 하는 대목이다. 마치 키티와 윌터의 관계를 암시하는 것도 같았다.


윌터는 “결국 죽은 건 개다”라는 말과 함께 세상을 등졌다. 키티는 찰스 타운센즈와의 관계도 깔끔히 청산했다. 그녀 인생에 이성으로 만났던 두 남성들과의 분열은 해결하지 못한 채로 끝이 났다. 하지만 그녀는, 그녀 인생의 제1의 남자인 친정아버지와의 유대를 통해 여성성을 회복했다.


결혼 전에 키티는 아버지를 그저 생게 유지를 위해 힘쓰는 사람으로만 생각했다. 사실 자신의 생계를 유지시켜 주는 존재 따위로만 생각했다. 모든 시련을 견디고, 자신의 실수를 받아들인 지금은 연로하고 고뇌하는 약한 남성의 모습도 비로소 긍정하게 되었다.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사회에서 자랐던 한 여성이, 인간 대 인간으로 상대를 아낄 줄 알게 된 것이다. <인생의 베일>을 통해 한 여성의 일대기, 그리고 성장통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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