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주인공이 아니다

by 림미노

필리핀 마닐라를 다녀왔다. 4박 5일간의 여정이었다. 바닷가의 여러 도시를 다녔고, 여러 사람을 보았다. 이번 여행에서 많은 걸 느꼈다고 말한다는 것은 분명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많은 걸 느끼진 못했어도 명확하게 느낀 점은 있었다. 오늘 이 글은 필리핀 마닐라를 5일간 걸어 다니면서 그 과정 속에서 얻게 된 몇몇 느낀 점을 끄적여보려고 한다.


하늘에서 내다 본 필리핀


인천국제공항에서 니노이아키노 국제공항까지 약 4시간에 걸친 비행 끝에 필리핀에 입국했다. 흔히 닭장 배열이라고 하는 좁디좁은 이코노미석에 앉았지만 챙김 받을 건 다 챙겨 받았던 빈곤하지만 풍요로웠던 필리핀 항공의 비행이었다.



저녁을 먹기 위해 하버뷰 레스토랑에 갔다. 들어서자마자 노인과 바다가 생각나는 그런 바다를 끼고 있는 레스토랑이었지만, 비단 풍경만 노인과 바다와 같은 것이 아니었다. 음식을 주문하고 인내하며 기다리고 있는 내가 순간 정말 노인이라도 된 것만 같았다. 주문이 들어간 지 한참이나 됐는데, 음식은 꽤나 늦게 나왔다.


음식은 맛있어서 다행이었다. 같이 시킨 사과 맛 산 미구엘도 예술이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술도 조금 들어가니 갑자기 생각에 잠겼다. 인생이란 무엇일까?라는 난데없는 철학적 사색이 시작된 것이었다. 이전 같았으면 "지금 이 순간에 철학적인 거는 좀 그만 생각하자"라며 스스로를 나무랐겠지만, 이미 시간이 지나버린 구멍 난 둑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여행도 왔겠다. 술도 마셨겠다. 배도 점점 불러오겠다. 그냥 오늘만큼은 내 머리가 원하는 거 다 하게 해 주자.라는 마인드로 곰곰이 멍을 때리기 시작했다.



해가 질 무렵에 해를 보고 문득 든 생각이었다. 한국에서도 볼 수 있는 저 태양이고, 필리핀에서도 볼 수 있는 태양이다. 지구 어느 곳에 있어도 태양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언제 보는지는 다를 순 있겠지만, 무엇을 보는지는 다 같다.


모종의 사유가 있는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해와 달은 어디에서든 누구나 볼 수 있다. 그래서 또 생각이 들었다. 필리핀 마닐라에 건너편 테이블에 있는 저기 저 필리핀 가족들, 그들의 가장인 한 남성의 삶은 어떨까? 그리고 나의 삶은 어떨까? 다른 얼굴을 가졌고, 다른 언어를 가졌고, 다른 삶을 살아왔지만 인간이라는 본질은 바뀌지 않고, 둘 다 어느 한 목표를 가지고 인생을 달리고 있다.


나 같은 사람이 참 많다. 여태껏 나는 내가 이 세상의 주인공이랍시고 살아왔던 것 같다. 지금 돌이켜보면 좋진 않은 것 같다. 나와 같은 사람은 수없이 많다.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결국에는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사람이 주인공이라는 결론이 도출됐다. 그리고 나는 "그렇다면 내 자존감의 원천은 어디서 끌어오지"라는 스스로의 물음에 부정적으로 매몰되지 않기 위해 한 가지를 더 생각하며 합리화를 했다.


"외부적으로는 내가 주인공이 아닐 수 있을지라도, 내부적으로는 내가 주인공이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선 내가 주인공이 아닐 수 있겠지만, 내 삶을 살아가는 내가 느끼기에 나 스스로를 속으로 주인공으로 칭할 수는 있다. 라며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더 스스로가 객관화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태껏 내가 너무 드라마 주인공 같은 삶을 선망해 오며 살아왔던 것은 아닐까? 조금 더 현실적인 면을 바라보면서 자존감을 고취해 내야 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이 들었고, 그 의문들에 스스로 답해가면서 그렇게 나는 이전보다 조금 더 단단해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