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에세이
하안동에서 살다가 철산동으로 이사 간 시기는 초등학교 6학년이 시작될쯤이었다. 학교를 처음에 딱 가자마자 엄마한테 이 학교 다니기 싫다고 말했던 기억이 있다.
뭔가 학교 건물이 촌스러웠고, 주변 분위기가 시골스러워서 그랬던 것 같다. 하안동에선 1~5학년을 가림초등학교에서 다녔다. 그 학교는 도덕초등학교에 비해 좀 크기도 했고, 한 학년에 13~15반이 있을 정도로 학생들이 많았다. 하지만, 도덕초등학교는 6학년이 딱 3개 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진짜 여긴 시골학교구나라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무슨 반 이름이 1반, 2반 3반이 아닌... 매반, 난반, 국반? 여기서 더 촌스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학급이 시작되는 3월에 도덕초등학교를 처음 갔다. 그때 모두 학교 운동장에 모여서 교장선생님 훈화 말씀을 듣고 새롭게 시작하는 교실로 올라가는 일정이었다. 첫날 학교 정문에 들어가서 운동장에 모여 있는 아이들 중에 가장 첫 번째로 본 애가 원호라는 친구였다. 아직도 기억이 선명한 게 연한 청바지를 입고 검은색 조끼를 입고 있었는데, 두 손을 조끼 주머니에 넣고 혼자 어리바리하게 어슬렁어슬렁 걷던 모습을 기억한다. (그리고 이 친구는 훗날 나와 초-중-고등학교를 같이 나오게 된다)
그리고 나한테 처음으로 말 걸어준 친구가 있었는데 0래라는 친구였다. 학교 화단 아래 돌계단 같은 곳에서 여러 아이들 틈에 혼자 뻘쭘하게 앉아 있던 나에게 건넨 한 마디가 "너 축구 잘해?"였다. 속으로 생각했다 "뭐야 이 축구 못하게 생긴 촌스러운 넘은.." (이 친구는 현재 내가 글을 쓸 수 있도록 동기와 영감을 불어넣어 준 귀한 귀인이 됐다) 하지만, 그 한마디가 너무 고마웠다. 모두가 서로 친한 상황에서 낯선 이방인에게 필요한 것은 누가 먼저 말 걸어주길 바라는 것이다. 경직되고 두려움에 떨던 오리 새끼가 약간의 날갯짓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 셈이다.
그 친구의 한 마디와 나의 대답으로 인해 처음 학교 간 날 수업이 끝나고 축구를 하게 됐다.
축구하기 전에 0래라는 친구가 또 무언가를 말해주었다. 아무래도 자기가 축구를 하자고 해서 뭔가 책임감을 느꼈는지, 이것저것 이야기해 준 기억이 있다.
"저기서 키 제일 크고 대가리 큰 애 있지? 쟤 조심해"
처음에 뭘 조심하라는 건지 잘 몰랐다. 아무튼 그 이유는 나중에 시간이 지나게 돼서 알게 됐지만, 그렇게 학교 첫날 수업 끝나고 정신없이 축구를 했다. 그때 축구를 내가 잘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친구들에게 축구를 잘한다는 인상을 주긴 했었나 보다. 축구가 끝난 이후 몇몇 애들이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축구 잘하네!"
"뭐 못하지는 않네"
이런 시골학교에서 축구로 뭔가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새 어깨가 우쭐해졌다. 그렇게 난 도덕초등학교로 전학을 와서 '바람의 전학생'이 되었다. 축구 좀 하는 애로 불렸다. 그렇게 학교에 차츰 적응해가고 있을 무렵, 한 달 뒤에 못 생기고 오른팔에 깁스를 한 어리숙한 놈 한 명이 또 전학을 왔다. 전학생 얼굴엔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생김새를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저놈은 찐따다!"
바람의 전학생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중에 새로온 전학생에게선 그 어떤 위기의식을 느낄 수 없었다.
어느 날 그 친구가 깁스를 풀었다. 그리고 어김없이 통과 의례처럼 같은 반 친구들끼리 축구를 했다. 그날 이후로 그 친구의 별명은 '공포의 전학생'이 되었다. 축구를 잘 하는 게 아니라 그냥...그냥 무지막지하게 매우 잘했다. (훗날 이 친구의 남동생은 청소년국가대표 상비군까지 하게 된다)
학교 첫날 처음으로 봤던 운동장에 혼자 어리바리하게 서 있던 원호는 나에게 축구를 좀 한다고 칭찬했었다. 하지만 찐따 전학생이 '공포의 전학생'으로 탈바꿈하던 그 이후부턴 원호는 나에 대한 반응을 조금 달리했다. 그리고 원호는 친구들에게 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야, 얘 축구 존나 못해"
바람의 전학생으로 장밋빛 학교 생활을 꿈꾸던 나의 꿈에 금이 가는 순간이었다.
하안동 이후로 다시 한 번 인생의 쓴 맛을 느꼈다.
인생은 실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