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엄마 바보… -김성희-]
난 평상시에 학교나 교회에 가는 것 외에는 밖에 나갈 수 없었고, 또래와 노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마녀에게 붙잡힌 채 탑에 갇혀 지내던 라푼젤처럼 말이다. 라푼젤이 실존 인물이었다면 그녀가 탑에서 벗어날 때마다 마녀에게 두들겨 맞았을 것이다. 내가 어머니에게 맞았던 것처럼. 그러나 어머니가 가출해 있던 이 시기에는 뜻밖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어느 날, 같은 반의 유영이라는 아이가 갑자기 다가와 자기 집에 초대했다.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유영의 부모님은 식당을 운영하느라 늘 분주했다. 이에 유영은 주로 낮 동안 집에 홀로 있었다. 그녀의 집에는 흥미로운 물건들이 가득했다. 다른 아이의 집을 처음 방문한 나는 한껏 들떠 집 안 구석구석을 탐색했다. 냉장고를 열어보고, 서랍과 장롱도 모두 뒤졌다. 냉동실에는 다양한 아이스크림이 있었는데 그중 가장 맛있어 보이는 하나를 집었다. 유영은 그걸 먹으려면 어머니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고집을 부려 먹고야 말았다. 화장실 찬장에서는 작은 병에 가득 담긴 하트 모양 캡슐을 발견했다. 향긋하고 말랑한 것이 달콤한 젤리인 것 같아 묻지도 않고 입에 털어 넣었다. 잘근 씹는 순간 물컹거리며 액체가 쏟아졌다. 역겨울 정도로 쓴맛이 나서 바로 뱉었다. 체온으로 녹여서 사용하는 화장품이었다. 입안에 남은 씁쓸함과 향기는 아무리 헹궈내도 가시지 않았고, 기분이 상해서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유영은 나 때문에 부모님에게 혼났다며 사과를 바랐다. 나 또한 기분이 좋지 않았기에 끝내 사과하지 않았다.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사이는 자연스럽게 회복되었고, 이후로도 여러 번 그녀의 집에 방문했다. 어느 날 그녀는 자신이 다니는 학원에 같이 가자고 했다. 그녀를 따라 들어선 학원은 비좁고, 아이들로 붐벼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수업이 시작되자 강사가 마이크를 쥐고 말했다. 소음은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 유영이 나를 함정에 빠뜨린 것 같아 울컥했다. 수업 도중 그녀에게 화를 냈고, 서로 다투는 바람에 학원에서 쫓겨났다.
우리는 학원 앞 오락실에 갔다. 책가방을 깔고 쭈그려 앉아 게임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유영의 옷을 잡아당겼다. 그녀의 아버지였다. 무척 화가 난 상태로 유영을 질질 끌고 나갔다. 학원 강사가 그에게 전화한 모양이었다. 다음 날, 유영의 팔에는 멍이 들어 있었고, 그녀의 말수는 줄어들었다. 항상 그녀가 먼저 내게 다가왔지만, 이번엔 내가 말을 걸어 학원에 함께 가고 싶다고 했다. 학원이 끝나고 우리는 오락실에 갔다. 짙은 밤이 되어 영업이 끝날 때까지 놀았다. 다음 날 유영의 팔에는 멍이 더 짙고 넓게 퍼져있었다.
며칠 동안 유영은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녀의 부모님이 나와 어울리지 말라고 한 것이다. 그녀는 나 말고도 친구가 많았다. 그녀의 친구들이 내 앞을 막고 섰다. 『유영이한테 사과해. 너 때문에 얘 맞았잖아. 멍 안 보여?.』 도대체 무슨 말인가 싶어 무시했다. 『야, 너 무시하냐?』 앞에서 계속 재잘거렸지만 난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내 잘못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미안해.』 엉겁결에 사과했으나 억울하고 혼란스러웠다.
며칠 후, 머릿속에서 퍼즐이 맞춰졌다. 나는 유영을 때리지 않았고, 단지 함께 교류했을 뿐이다. 그런데 왜 큰 죄라도 저지른 것처럼 사과해야 했는지, 억울하고 부당하게 느껴졌다. 깡패처럼 몰려와 사과하라고 겁박한 그녀의 친구들이 괘씸했다. 『난 아무 잘못 없어. 전에 한 사과는 취소야. 쟤네 아빠가 때린 거니까 쟤 아빠한테 사과하라 그래!』 난 배급받은 우유를 던지며 소리쳤다. 우유가 터져 사방으로 튀었고, 그들은 펄쩍 뛰며 내게 책임을 물었다. 『세탁비는 무슨, 너네가 잘못한 거니까 너네가 알아서 해.』 직성이 풀리니 그들의 말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단지 지지직거리는 소음 취급하며 자리에 앉아 귀를 틀어막았다.
시간이 흘러 어머니가 동생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집 안 곳곳 붙어있던 붉은 스티커도 다 사라졌다. 아버지가 모아둔 돈으로 빚을 청산하고 어머니를 용서한 덕분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또다시 화가 나 있었다. 『너 엊그제 어디 갔었어. 왜 유영이네 집 벽에 낙서했어.』 나는 유영의 집에 가지 않은 지 오래였다. 『그런 적 없어요, 걔네 집 안 갔어요.』 아무리 항변해도 어머니는 귀를 막고 있었다. 이전에 유영과 있던 일도 전부 알고 있었다. 유영의 부모님이 낙서 때문에 전화를 걸었다가 모두 말한 것이었다. 『잘못했어요.』 어머니가 매를 들고 오길래 일단 빌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곧장 때리지 않고, 애써 화를 억누르는 듯 보였다. 『팬티 빼고 옷 다 벗어.』 그녀는 내게 옷을 벗으라고 했다. 옷을 벗으라기에 양말은 벗지 않았더니 그녀가 나를 쭉 훑어보고, 뺨을 후려쳤다. 『장난해? 양말도 벗어.』 그대로 대문 밖 골목길로 쫓아냈다. 나는 창피해 숨으려고 했다. 『한 번 더 숨으면 뒤지게 맞을 줄 알아.』 어머니는 창문을 통해 감시하며 몸을 숨기지 못하게 했다. 온몸을 비틀어 맨살을 가리려 했지만 차렷 자세로 똑바로 서 있으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녀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옆집 계단에 숨었더니 맨발로 쫓아 나와 내 머리끄덩이를 잡아끌고 매질했다. 그리고 다시 골목 중앙에 세웠다.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모두 나를 쳐다봤다. 어머니는 모기장이 설치된 반지하 창문을 통해 그 광경을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
노을이 살결에 스며들어 옷 입혀주는 듯한 저녁이 되었다. 어머니는 문을 열어 들어오라고 소리쳤다. 곧 아버지가 돌아왔다. 저녁 식사는 김치찌개였다. 그날의 기억이 어찌나 생생한지 그 김치찌개의 맛과 푹 익어 물컹거리는 배추의 촉감이 아직도 입안에 감도는 듯하다.
나는 정말 낙서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인이 되어서까지 억울했다. 나중에 어머니에게 그 일에 관해 물어보니, 자신이 직접 낙서를 보았다고 했다. 벽 구석에 빨간 글씨로 「유영이 바보 -김성희-」라고 적혀 있었다고. 그 이야기에 또다시 기가 막혔다. 아무리 생각이 짧아도 누가 그런 낙서를 하면서 본인 이름을 적어 놓을까? 게다가 난 그리 치사한 성격이 아니었다. 만약 그녀가 바보 같았다면, 직접 대놓고 바보 같다고 말했을 것이다. 직설적인 성격 때문에 의도치 않게 잔인했을지는 몰라도, 뒤에 숨어서 낙서로 누군가를 놀리거나 하지는 못하는 아이였다. 아직도 누구의 소행인지 모르나, 그 범인이 부디 만수무강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