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의 생명력에 천착한 여성 화가, 로자 보뇌르
생명 그 자체가 내뿜는 날것의 에너지가 이토록 생생하고 강렬하게 뿜어져 나오는 그림을 본 적이 있었나 싶습니다. 19세기 프랑스 여성 화가인 로자 보뇌르(Rosa Bonheur, 1822-1899)의 <말 시장>(1853)입니다.
갈기를 휘날리며 화폭 안을 누비는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말입니다. 말 위에 올라탄 사람, 말고삐를 끌고 가는 사람도 있지만 말은 그들의 통제를 받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히려 힘의 정도와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말이고, 말의 움직임을 따라 사람의 몸이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만큼 말의 힘찬 기세가 느껴지네요.
사실 서양미술의 역사에서 동물은 주인공이기보다는 인간을 돋보이게 하거나 일상의 풍경 속 소품처럼 자리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주인 옆에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화면의 분위기를 경쾌하게 하거나 주인에 대한 신의를 표현하며 주인의 인격을 높이는데 일조하기도 했지요.
나폴레옹을 등에 태우고 앞다리를 높이 치켜들었던 말은 어땠나요? 작은 키의 나폴레옹이 하늘과 더 가까이 닿을 수 있도록, 관람자의 시선이 그를 더 우러러 볼 수 있도록 해주는 존재였지요.
하지만 보뇌르가 그린 말은 확실히 다른 존재입니다. 힘찬 다리의 움직임, 그 다리와 몸을 움직이게 해주는 근육의 꿈틀거림,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생명력 그 자체로 경이로움을 줍니다. 눈을 뗄 수 없는 본능적 힘에 대한 찬사가 절로 나옵니다.
보뇌르는 어렸을 때부터 동물을 좋아해서 토끼나 닭, 염소 같은 가축부터 카나리아 같은 새에 이르는 여러 동물들을 파리의 아파트에서 키웠다고 합니다. 그녀는 아마 동물과 사랑에 빠졌던 것 같습니다. 그녀의 그림이 독보적이었던 이유이기도 하지요. 그녀의 그림 속 동물들은 완전히 살아있는 존재입니다. 단지 그들의 몸짓을 수려하고 실감나게 화폭에 담았던 것 뿐 아니라 생명을 가진 존재로, 의도와 감정을 가진 존재로 그렸습니다.
<니베르에서의 쟁기질>(1849)에서 소는 사람에게 이끌려가는 중이지만 지쳐있지도, 슬퍼 보이지도 않습니다. 외부를 응시하는 그의 눈에는 육중한 몸만큼이나 차분하고 존엄한 본성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에두아르 루이 뒤뷔프가 그린 보뇌르의 초상화에 소가 함께 등장한 것은 그녀와 동물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화면 밖을 강렬하게 바라보는 소의 눈과 꽉 다문 입은 보뇌르를 지켜주는 듬직한 수호신 같기도 합니다. 그녀 자신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그녀의 세계관에 동물은 응당 함께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실제로 그녀는 자신을 동물에 비유하기를 즐겼다고 하네요. 사회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배제되기 쉬웠던 여성 화가의 존재와 인간을 위해 이용되고 도구화 되었던 동물의 존재는 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되어 있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 연결에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던 화가 로자 보뇌르를 기억하고 싶습니다. 20세기를 목전에 두고 사회에서 소외되었던 존재들이 점점 선명히 드러나는 모습도 흥미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