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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역사의 무대를 걷다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의 소년이 다시 쓴 영국사

by 꽃보다 예쁜 여자


초록 언덕과 양 떼가 어우러진 코츠월드를 나서자, 오래된 영국 전원의 풍경이 이어졌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에이번 강가의 작은 마을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세계 문학을 바꾼 인물, 셰익스피어가 1564년 태어난 곳,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Stratford-upon-Avon)이다.


코츠월드 민스터 러벨(Minster Lovell), 스트랫퍼드로 향하는 길, 기울어진 목조와 석조가 어우러진 고풍스러운 집

말름즈버리, 토마스 홉스의 고향에서


스트랫퍼드로 향하는 길, 코츠월드 서쪽 끝 마을 말름즈버리(Malmesbury)에 잠시 들렀다. 커다란 현수막이 먼저 눈길을 끌었다. ‘Thomas Hobbes of Malmesbury’ 바로 이곳이 근대 정치철학의 거장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의 고향임을 알리고 있었다.


지금은 집이 사라졌지만, 홉스를 존경한 학자이자 전기 작가 존 오브리의 기록 덕분에, 그의 생가 위치와 당시 모습을 알 수 있다.


1588년, 홉스는 이 마을의 작은 오두막집에서 태어났다. 마침 그가 태어난 해, 스페인 무적함대가 영국을 침공했다가 패배하며 해양 패권의 새 시대가 열렸다. 그래서였을까. 홉스는 훗날 자신을 두고 “공포와 함께 태어났다(born in fear)”라고 회상했다.


셰익스피어의 전성기 또한 이 엘리자베스 1세 시대와 겹친다. 런던의 무대에서 인간의 욕망과 권력이 드라마로 펼쳐지던 바로 그때, 코츠월드 끝자락 말름즈버리의 작은 오두막집에서는 인간 본성을 탐구한 철학자가 태어나고 있었다.


지금은 집이 사라지고 1867년에 세워진 연합개혁교회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유럽 곳곳을 여행하며 사상을 탐구했던 그는 늘 말름즈버리를 자신의 뿌리로 여겼다고 한다. 사라진 집 대신 남은 이름이 수백 년 뒤에도 여전히 이곳으로 사람들을 불러 세운다는 사실이 묘하게 인상 깊었다. 이곳은 작은 시골 마을이 아니라, 근대 정치철학의 출발점이자 역사가 켜켜이 쌓인 공간이었다.



교회 담장에 걸린 현수막 ’THE HOBBES DIG. 행사 안내


In the state of nature, the life of man is solitary, poor, nasty, brutish, and short.
자연 상태에서 인간의 삶은 고독하고, 빈곤하며, 고통스럽고, 야만적이고, 짧다.
- 토마스 홉스 <Leviathan>


홉스는 대표작 <리바이어던> (Leviathan) 에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지키려 하지만, 법과 권위가 사라진 세상에서는 서로 부딪치며 혼란이 올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는 이러한 무질서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the war of all against all)이라 불렀고, 그 혼돈을 멈출 수 있는 것은 거대한 괴물처럼 절대 권력을 가진 국가, 곧 리바이어던뿐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근대적 사회계약론의 사상이 시작되었다.


말름즈버리, 토마스 홉스의 고향


철학자 홉스(1588–1679)의 언어와 극작가 셰익스피어(1564–1616)의 언어는 서로 다른 시대와 장르에 속해 있었지만, 결국 두 사람 모두 이 길 위에서 피어난 영국 인문학의 꽃들이었다.


고대 문명의 상징, 스톤헨지


그리고 말름즈버리가 속한 윌트셔(Wiltshire)에는 고대 문명의 상징인 스톤헨지(Stonehenge)가 자리한다. 영국 중남부의 길 위를 걷는다는 것은 곧, 고대에서 근대로 이어지는 인문학의 심장부를 밟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마침내 에이번 강변의 작은 마을,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Stratford-upon-Avon)에 닿았다.



Stratford-upon-Avon, 이름의 뜻


Stratford-upon-Avon이라는 지명은 고대 영어 straet (라틴어 strata, 로마 도로)와 ford (여울)에서 비롯되어, ‘로마 가도가 지나던 여울 마을’을 뜻한다. Oxford(황소가 건너던 여울), Cambridge(케임 강 위 다리)처럼, 이름 속에 새겨진 지리적 흔적은 훗날 이 지역이 인문학의 심장부로 자리 잡는 토대가 되었다. 지명 속에 스며든 언어와 풍경 속에서 역사의 뿌리가 전해진다.





셰익스피어 생가, Stratford-upon-Avon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의 중심 거리로 들어서자, 셰익스피어 생가로 이어지는 골목 입구에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 동상이 서 있었다. <한여름 밤의 꿈(A Midsummer Night’s Dream)> 속 장난꾸러기 요정, 퍼크(Puck) 다. 수백 년 전 런던의 무대에서 인간과 요정의 세계를 뒤섞으며 웃음과 혼란을 일으키던 인물이, 이제는 스트랫퍼드의 거리 위에서 여행객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었다.


<한여름 밤의 꿈> 은 아테네의 젊은 연인들, 요정 왕 오베론과 티타니아, 그리고 장난꾸러기 퍼크가 얽히며 벌어지는 환상극이다. 그 속에서 셰익스피어는 사랑의 불합리함과 인간의 어리석음을 기발하게 그려냈다. 무대 위에서 안내자 역할을 맡았던 퍼크는, 이제 골목 입구에서 다시 그 웃음과 혼돈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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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보다 예쁜 여자가 되고 싶어 꽃을 만드는 공예가입니다. 물론, 외면이 아닌 내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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