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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강 Jan 21. 2024

나를 살린 암

2008년 3월, 긴 겨울을 이기고 막 봄을 맞으려고 할 때 사단이 났다. 흉통이 있어 동네 의원을 갔더니 진단하기가 어려우니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환자에게서 전염된 결핵이거나 간염이 아닐까 생각하고 큰 병원에 갔다.     


참으로 많은 검사와 진단을 거친 후 주치의가 내린 병명은 폐암 3기였다. 큰 병원도 더러는 오진이 있을 수 있다 싶어 두 번째, 세 번째 병원을 갔지만 같은 병명을 주었다. 세 병원을 못 믿어 다른 병원을 가려해도 더는 갈 병원이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크기로 이름난 병원 세 곳을 다녔으니.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으니 걱정이 밀려왔다. “얼마나 아플까.” 항암을 하면서 아파하는 환자들 모습이 영화 필름처럼 지나간다. 죽고 살고를 떠나 얼마나 고통이 따를지가 가장 걱정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 누가 내 곁에 있어줄까.   

  

주치의와 마주 앉아 하나도 숨김없이 전부 다 이야기 해달라고 했다. 보호자가 없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하니 도와 달라고 애원 아닌 애원을 했다.    

  

폐암 3기. 6개월 시한부의 삶을 주었다. 6개월도 당장 항암 치료를 받고 수술을 하는 조건으로 달아준 삶이다. 기가 찬다. 내가 6개월을 살고 죽는단다. 집으로 돌아오려는데 다리가 후들거려 걸을 수가 없었다. 직원의 도움으로 택시를 타고 집으로 왔다. 그리고는 기절을 했다.  

    

직장에 전화를 하고 일주일 정도를 방 안에서 울었다. 어디서부터 무슨 일을 시작해야 할지가 생각나지 않았고 이 사실을 누구에게 알려야 할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에겐 상의 할 사람도 걱정이나 고민을 나눌 사람도 없었다. 누구의 의견도 필요하지 않은 오로지 나만의 문제였다.   

  

언제 죽느냐 보다는 어떻게 사느냐가 나에게는 더 큰 고민이었다. 지금까지 병원에서 본 수 많은 환자들의 고통스런 나날과 죽음. 그리고 사랑이 말라버린 지친 보호자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렇게 일주일을 고민하고 내린 결정이 서울을 떠나는 것이었다. 아니 서울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나를 격리 시키는 일이었다. 왈가왈부 가타부타 하는 사람들의 넋두리를 들을 여유가 나에게는 없었고 옆에서 그런 것들을 거들어 줄 가족도 나에겐 없었다.    

 

불교대학 동기 스님이 있는 작은 암자로 갔다. 스님에겐 그냥 휴양 차 왔다고 했다. 공밥이 먹기 싫어 법당 청소를 하거나 절 마당을 쓸거나 하다못해 스님들 고무신도 닦고 공양간(供養間)에서 설거지라도 거들었다.     


아는 신부님이 있는 성당에서는 주일학교 학생들을 가르쳤고 미사 반주도 하고 예비신자 교리반도 도왔다. 잘 먹고 잘 자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았다. 언제 죽어도 좋으니 제발 아프게만 하지 말아 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이렇게 6개월을 작은 암자와 성당의 사제관에서 보냈다. 병에 대한 그 어떤 치료도 하지 않았지만 죽지 않았다. 내가 한 것이라곤 통증이 심할 때 진통제를 쓴 것뿐이다. 그렇게 6개월을 보내고 서울로 와서 집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이민을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집을 비웠다.  

    

작은 트렁크 하나를 남기고 다 정리했다. 참으로 홀가분하고 시원했다. 지금 당장 세상을 뜬다 해도 나 때문에 번거롭거나 힘든 일이 없다고 생각하니 그렇게 마음이 가벼울 수가 없었다. 가슴에 품고 다닌 것은 장기기증서와 시신기증 등록증뿐.  

   

그렇게 3년을 나는 세상과 등지고 살았다. 하루하루의 삶에 최선을 다했고 오늘밤이 생의 마지막 날이라 생각하며 저녁마다 유서를 베고 잤다. 눈 뜨면 열심히 움직였고 잘 먹고 잘 쉬고 잘 자고. 그냥 단순하고 원초적인 삶을 살았다.  

   

그렇게 살면서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이 경북 영주시 풍기읍이었다. 영주 시내에 살지 않고 풍기에서 산 것은 가까이 희방사가 있고 소백산이 있어서였다. 풍기에 살면서 시내 병원에서 시간제 일도 했다. 정해진 시간과 정해진 일이 있으니 좀 더 열심히 먹고 열심히 쉬게 되었다.      

    

일 하지 않은 시간은 걸었다. 풍기에서 희방사까지. 죽령 고개까지. 부석사까지 걷고 또 걸었다. 발에서 피가 나도록 걸었다. 물집이 터져 굳은살이 되도록 걸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도시 풍기에서 2년을 살고 다시 도시로 나왔다. 도시에서 다시 만난 사람들을 하나같이 놀라며 기적이 일어난 것이라고 기뻐해 주었다. 내가 생각하기엔 하나도 기적이 아닌데 말이다.  

          

나는 지금 다시 도시에서 살고 있고 직장도 다니고 있다. 암 덩어리가 내 몸 속에 있는지 없는지 확인은 하지 않았지만 분명한건 내가 암을 이긴 것이다. 무섭던 통증을 이겼고 두렵던 죽음도 이겼다.    

  

병원 중환자실에서 일하면서 참으로 많은 환자들과 보호자를 만났다. 나처럼 기적이 일어나 생명을 얻어 퇴원을 하는 환자 보다는 병을 이기지 못해, 자신을 이기지 못해 생을 마감하는 환자를 더 많이 봤다. 환자는 병을 이기는 것 보다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걸 잘 못한다. 특히 시한부 삶을 사는 사람들을 더욱 더 자신을 다스리고 이기지 못한다. 

     

마지막 순간이 코앞이라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간절한 마음이 되고 그러다 보면 귀는 팔랑 귀가 되고 들은 대로, 하라는 대로 다 해 보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대부분은 거기에서 무너지고 만다. 세상에 떠도는 좋은 비법을 내가 다 할 수는 없다. 돈도 돈이지만 주어진 시간도 모자라고 체력에도 한계가 있다. 

    

빨리 자신의 형편과 체력과 삶에 맞는 한 가지 방법을 찾아 그것에만 몰두해야 한다. 그것이 병을 이기는 방법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흔들리지 않는 자신만의 확고한 주관이 있어야 병을 이길 수 있다. 나는 그 방법을 빨리 찾았다. 돌봐줄 가족이 없는 혼자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람의 마음은 먹기 나름이다” 다시 말해 사람의 마음도 나 하기 나름인 샘이다. 사람이 마음먹으면 못 할 일이 없다. 하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누구나 다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간절해야 하고 진실 되어야 하며 한결 같아야 얻을 수 있다.



사진 출처 : 다음 이미지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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