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우리는 왜 친절함을 연기하는가?

플라스틱 친절(Plastic Kindness)

by 김삼월

“오늘 하루 우리는 몇 번이나 ‘가짜 미소’를 지었는가? ”


편의점에서 계산할 때, 엘리베이터에서 이웃과 눈이 마주쳤을 때, 혹은 친구의 무리한 부탁에 대답할 때 등. 당신의 입꼬리는 과연 얼마나 진심이었는가?


오늘날 우리가 주고받는 다정함의 상당수는 유기적인 생명력을 잃은 채, 매끈하고 견고하며 대량생산이 가능한 플라스틱을 닮아가고 있다.


과거의 친절은 개인의 내면에서 길러진 인격의 자연스러운 유출이었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에토스’의 영역이었으며, 개별적인 상황과 인연의 맥락 안에서 발현되는 고유한 행위였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이 지극히 개인적인 덕목을 ‘서비스’라는 이름의 상품으로 규격화했다. 기업의 CS(Customer Satisfaction) 매뉴얼은 이제 인간의 감정마저 조립 라인의 부품처럼 생산한다. 눈의 각도, 입꼬리의 높이, 목소리의 톤(솔톤을 유지하세요)까지 세밀하게 규정된 이 ‘플라스틱 친절’. 우리는 진심을 담지 않아도 친절할 수 있게 되었고, 플라스틱한 친절은 이제 특정 직책의 전유물이 아니라 현대인 전체의 생존전략이 되었다.



감정의 문법



이러한 플라스틱 친절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다정함은 이제 ‘성품’이 아닌 ‘기술’의 영역으로 편입된다. 자본은 인간의 복잡 미묘한 감정을 효율이라는 잣대로 재단하기 시작했다. 누군가와 깊이 연루되어 발생할 수 있는 감정적 마찰과 비용을 줄이기 위해, 우리는 서로에게 가장 매끄럽고 무해한 형태의 단면만을 보여주기로 합의한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감정적 가성비’를 추구하는 행위다.


진심을 담아 누군가를 마주하는 일은 에너지가 소모되는 고비용의 노동이지만, 규격화된 친절을 내미는 것은 에너지를 최소화하면서 사회적 안전거리를 확보할 수 있는 저비용의 전략이다. 결국, 현대인의 세련된 매너 뒤에는 타인과 깊게 섞이고 싶지 않다는 지독한 방어기제와, 모든 관계를 비즈니스적 교환 가치로 치환하려는 서늘한 계산이 숨어 있다.



전시된 다정함



플라스틱 친절이 가장 화려하게 군락을 이루는 곳은 단연 디지털 공간이다. SNS는 친절을 실천하는 장소가 아니라 ‘전시’하는 거대한 쇼윈도가 되었다. 우리는 타인에게 비춰질 자신의 ‘무해하고 다정한 이미지’를 정교하게 조각하며, 그 과정에서 친절은 하나의 세련된 ‘취향’으로 소비된다.


이곳에서 다정함은 타인을 향한 순수한 지향이라기보다, 자기 자신을 설명하는 매력적인 형용사가 된다. 그곳에서 친절은 타인의 비극을 배경 삼아 나의 선량함을 돋보이게 하는 ‘미학적 장치’에 가깝다. 그것은 단지 플라스틱 꽃처럼 박제되어 전시될 뿐이다.


이 전시된 다정함의 극장에서 우리는 모두 관객인 동시에 배우가 된다. 연기된 친절은 우리 내면의 공허를 채워주지 못한다. 우리는 갈수록 고립되어가며, 어떻게 가면을 벗어야 할지 잊어버리고 만다.



무례함의 반작용으로서의 친절



그렇다면 왜 우리는 그토록 필사적으로 친절을 연기하는가? 그것은 아마도 현대 사회 속 개인은 갈수록 고립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타인에게 무례하게 굴었을 때 돌아올 사회적 낙인과 불이익은 꽤나 치명적이다. 그래서 ‘플라스틱 친절’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방어기제로 작용한다.


“친절한 미소는 ‘나를 공격하지 마세요’ 혹은 ‘당신에게 관심 없으니 선을 넘지 마세요’라는 세련된 거절의 신호가 된다.”


갈등을 직면하고 해결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차라리 영혼 없는 친절을 주고받으며 표면적인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더 나은 것 같다. 하지만 플라스틱으로 코팅된 우리들의 관계에는 그 어떤 불꽃도 일지 않기에, 결국 외로움만 남게 된다.


플라스틱이 분해되며 미세 플라스틱이 되어 생태계를 위협하듯, 연기된 친절은 자아를 분열시킨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비명을 지르는 괴리는 우울증, 번아웃, 공황장애라는 이름의 대가를 요구한다. 우리는 스스로가 지은 미소에 속아 자신의 진짜 감정이 무엇인지조차 잊어버리게 된다.



가면 뒤의 얼굴을 마주하는 용기



어떤 질감의 친절을 선택하며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는 단순한 처세를 넘어 실존적인 ‘취향의 윤리’에 해당한다. 플라스틱 친절은 당장의 마찰을 줄여주는 편리한 도구이자 사회적 안전장치임이 분명하지만, 영혼에 깊은 흔적을 남기지 못하는 일회용 소품에 불과하다.


우리는 사회라는 무대 위에서 박수받는 배우가 되기 위해 스스로를 매끈하게 깎아내는 일을 멈춰야 한다. 진정한 윤리는 상대의 비위를 맞추는 정교한 연기가 아니라, 때로는 서로의 모난 부분에 찔려 피를 흘릴지언정 끝내 상대의 존재를 정직하게 마주하겠다는 성실함에서 비로소 싹트기 때문이다.


썩지 않는 플라스틱은 결국 생태계를 파괴하는 쓰레기가 되지만, 유기적인 진심은 부패의 위험을 감수하는 대신 누군가의 삶을 비옥하게 만드는 거름이 된다. 이제는 미소 아래 감추어두었던 진짜 얼굴을 용기 있게 꺼내 놓아야 할 때다. 서투르고 투박하며, 때로는 정중하게 불쾌함을 드러내는 ‘가공되지 않은 진실함’이야말로 매끄러운 가짜들의 시대에 우리가 회복해야 할 가장 고귀한 취향이다.


영원한 가짜보다 유한한 진심을 택하는 것, 그 거칠고 따뜻한 체온의 연결만이 우리를 연기하는 기계가 아닌 살아있는 인간으로 머물게 할 것이다.


훗날 우리의 삶에 매끈한 플라스틱 조각이 아닌, 투박하지만 깊게 패인 진심의 흔적들이 남겨지기를 소망한다. 그것이 바로 플라스틱 친절의 시대를 건너가는 우리가 견지해야 할 마지막 품격이자 실존의 문법이 아닐까.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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