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쾌함은 권력이 될 수 없다
“왜 그런 옷을 입었어? 정말 불쾌해.”
우리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다양성’과 ‘개인의 취향’이 존중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 소셜 미디어에는 각자의 독특한 라이프스타일이 전시되고, ‘취존(취향 존중)’이라는 단어는 현대인의 필수 에티켓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화려한 다양성의 이면에는 지극히 날카로운 칼날이 숨어 있다.
현대 사회에서 개인의 취향은 종종 단순한 기호를 넘어 그 사람의 서열이나 지적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로 변질된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내가 즐기는 음식, 내가 지지하는 가치관이 누군가에게는 조롱의 대상이 되거나, ‘수준 미달’이라는 낙인의 근거가 된다. 이러한 경멸은 보이지 않는 사회적 폭력으로 이어지며, 그 정점에는 아주 일상적이고도 서늘한 문장이 자리 잡고 있다.
“나랑은 좀 안 맞는 것 같아.“
이 문장은 얼핏 보면 자신의 기호를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실상은 상대방의 존재 방식을 단칼에 거부하는 태도를 함축하고 있다. 대화를 지속하거나 서로의 간극을 좁히려는 노력 자체를 무용하게 만드는 이 말은, 현대 사회가 앓고 있는 ‘관계의 피로’를 가장 효율적으로 해결하려는 도구로 사용된다.
감정은 어떻게 무기가 되는가?
인간의 관계 속에서 갈등은 필연적이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개인이 만나 부딪히는 것은 자연의 섭리와도 같다. 그러나 최근의 양상은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불쾌한 감정’을 근거로 상대를 제거하거나 차단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어떻게 우리의 지극히 사적인 감정이 타인을 공격하는 정당한 무기로 둔갑하는가?”
감정이 무기가 되는 과정은 대개 ‘주관적 불편함의 객관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내가 누군가로 인해 불편함을 느낄 때, 일부 사람들은 그 원인을 내면에서 찾기보다 상대방의 결함으로 규정지어 버린다.
“나는 기분이 나빠"라는 문장은 어느새 “너는 기분 나쁜 사람이야”라는 존재론적 공격으로 전이된다.
이러한 전이는 우리 사회의 감정 과잉 상태와 맞닿아 있다. 자신의 감정을 절대적인 진리로 믿는 순간, 그 감정에 반하는 모든 타인은 ‘틀린’ 존재가 된다. 이때 ‘안 맞는다’는 표현은 더 이상 조율의 영역이 아닌, 폐기와 단절의 영역으로 이동하게 된다.
착각: 감정은 권리가 아니다
우리는 흔히 자신의 감정을 존중받아야 할 신성한 권리로 오해한다. “내가 그렇게 느낀다는데 네가 무슨 상관이야?”라는 논리는 현대인들의 강력한 방어기제다.
물론 개인이 느끼는 감정 자체는 거짓이 아니다. 하지만 그 감정이 타인에게 특정한 책임을 묻거나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도덕적 권리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감정은 사실 철저히 개인적인 생리 현상에 가깝다. 배가 고프거나 졸린 것과 마찬가지로, 불쾌함이나 거부감 역시 내 몸과 마음이 보내는 반응일 뿐이다.
배가 고프면 내가 밥을 먹어야 하듯, 감정이 상했다면 본인이 그 감정을 다스리고 해소해야 한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자신의 불쾌함을 상대방이 해결해줘야 할 ‘부채‘로 간주한다. ”내가 불편하다“는 말이 무기가 되는 사회에서, 감정은 타인을 통제하는 권력이 된다. 상대방의 행동이 객관적으로 잘못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나의 불편함을 근거로 상대를 죄인으로 만드는 행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감정은 내가 처리해야 할 내부의 숙제이지, 타인을 심판하기 위해 휘두르는 사법권이 아니다.
감정을 신호로, 사고를 문제해결로
감정은 신호일 뿐, 문제 해결의 주체가 아니다. 우리는 감정과 사고를 명확히 분리해서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다.
첫째, 감정은 ‘신호’다. 그것은 자동차 계기판에 들어오는 경고등과 같다. 연료가 부족하다는 신호가 왔을 때, 우리는 경고등 그 자체를 고치려 하지 않는다.
둘째, 사고는 ‘해결방식’이다. 신호를 보고 '연료를 채워야겠구나'라고 판단하는 것은 사고의 영역이다. “이 불편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상대방의 행동이 보편적 윤리에 어긋나는가, 아니면 나의 개인적 취향에 맞지 않는 것인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내가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인가?” 등.
이러한 논리적 카테고리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신호(감정)가 오자마자 바로 반응(폭력적 언어)을 내뱉는 것은, 화재경보기가 울린다고 해서 건물 전체를 부수어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감정은 현상을 알려주는 기능만 할뿐이다.
다름을 '틀림'으로 규정하는 게으름
‘너랑은 안 맞아’라는 말 뒤에 숨겨진 또 다른 본질은 ‘사유의 게으름’이다.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막대한 정신적 에너지를 소모한다. 상대의 성장 배경, 그가 가진 고유한 취향의 맥락을 파악하는 대신 ‘안 맞는다’는 한마디로 카테고리를 분류하는 것은 그저 회피일 뿐이다.
특히 취향의 영역에서 이러한 폭력성은 두드러진다. 현대 사회에서 취향은 곧 정체성이다. 누군가가 좋아하는 비주류 음악, 독특한 패션, 소수적 의견을 이상하다거나 나와는 맞지 않는 수준 낮은 것으로 치부하는 행위는, 그 사람의 정체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산이 있고 바다가 있듯, 각자의 취향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취향을 표준으로 삼고, 그 표준에서 벗어난 이들을 ‘맞지 않는 존재’로 규정하며 배척한다. 이러한 태도는 다양성을 표방하는 현대 사회의 가장 큰 모순이며, 개인을 고립시키는 주된 원인이 된다.
성숙한 관계를 위한 거리 두기
결국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은 ‘맞는 사람’을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맞지 않는 사람과도 공존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진정한 성숙함은 나의 감정과 타인의 존재를 분리할 줄 아는 능력에서 나온다.
우선, 내가 느끼는 불쾌함이 상대의 잘못인지, 아니면 나의 편견인지를 냉정하게 질문해야 한다. 대부분의 ‘안 맞음’은 상대의 악의가 아니라 각자의 삶의 궤적이 다르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리고 “너랑은 안 맞아”라는 종결 어미 대신, “우리는 이 부분에서 관점이 다르구나”라는 과정의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단정 짓는 말은 벽을 만들지만, 설명하는 말은 창을 만든다.
마지막으로 타인은 나의 감정을 만족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연출물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타인은 그 자체로 완전한 타자이며, 나와 맞지 않는 것이 지극히 정상임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겐 ‘맞지 않는 사람’이다. 내가 휘두른 칼날은 나를 향해 반드시 되돌아옴을 기억해야 한다.
감정이라는 신호를 지혜롭게 읽어내고, 사고라는 도구를 통해 타인과의 거리를 조정할 줄 아는 사회. 자신의 불편함을 권리로 착각하지 않고, 타인의 취향을 그 자체로 내버려 둘 줄 아는 여유.
폭력은 사실 거창한 것이 아니다. 상대를 이해하려는 마음을 포기한 채 내뱉는 차가운 말 한마디, 그 속에 담긴 감정의 오만이 가장 일상적이고도 무서운 폭력임을 깨달아야 한다. 타인과의 불협화음을 소음이 아닌,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윤리적 취향인’으로 거듭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