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아비투스(Habitus)를 거부한다

취향은 계급인가, 태도인가

by 김삼월

“현재 가지지 않았다고 해서, 앞으로도 평생 가질 수 없는 걸까?”


이 짧은 질문은 단순히 값비싼 물건을 소유하지 못한 자의 체념 섞인 푸념이 아니다. 가끔 화려한 조명 아래 걸린 난해한 현대 미술 작품 앞을 서성일 때, 혹은 이름조차 발음하기 어려운 빈티지 와인의 이름을 말할 때, 혹은 누군가의 낯설고도 압도적인 향기가 내 코 끝을 스칠 때 우리는 묘한 위축감을 느낀다.


이 위축감은 단순한 부끄러움이 아니다. 사실 그것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환경이, 내가 겪어온 일상의 척박한 풍경들이 그려내는 서늘한 자각일 것이다. 어쩌면, 나의 미적 감각은 이미 자라오면서 한계지어졌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흔히 ‘취향’이라 부르는 이 무형의 자본은 종종 잔인할 정도로 세습적이다. 어떤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자연스럽게 고도의 미적 감각을 공기처럼 호흡하며 자라지만, 누군가에게는 배워야 할 영역이거나 아예 다른 차원의 ‘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것은 뒤늦게 의식적으로 끊임없이 학습하고 쟁취해야만 하는 외국어와 같아서, 이따금 절망에 빠지게 하곤한다. 내가 아무리 치열하게 노력해도, 은연중에 배어 나오는 그들의 우아함이나 감각적인 안목의 깊이를 결코 따라잡을 수 없을 것만 같은 두려움.


우리가 향유하고자 하는 아름다운 취향은 과연 특정 계층에게만 허락된 것일까? 이 질문은 단지 물질적 소유에 대한 한탄이나 타인의 삶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넘어선다. 태어난 환경이 개인의 미적 감각과 삶의 결마저 영원히 결정짓는다는 숙명론은 거부되어야 한다.



고급 취향은 상류층의 전유물인가?



흔히 이른바 ‘고급 취향’은 태어날 때부터 자연스럽게 체화된 상류층만의 전유물로 여겨지곤 한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이러한 씁쓸한 현상을 ‘아비투스(Habitus)’라는 개념으로 명쾌하고도 서늘하게 꼬집어냈다.


아비투스란 특정 사회적 환경이나 계급 속에서 오랜 시간 동안 길러져 내면화된, 일종의 무의식적인 성향이나 습관의 체계를 뜻한다. 이는 단기간의 학습이나 암기로 얻어지는 지식과는 결이 다르다. 어떤 음악의 선율에 마음이 동하는지, 어떤 미술 작품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사유에 잠기는지, 심지어 고급 레스토랑의 식탁 위에서 와인 잔을 쥐는 손가락의 각도나 타인과 대화를 나눌 때 넌지시 화두를 던지는 방식조차도 결코 순수한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르디외의 시각에 따르면 취향은 철저히 계급적이며 배타적이다. 우리는 종종 머리부터 발끝까지 값비싼 명품 로고로 도배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어색한 이들과, 무심하게 걸친 기본 셔츠 하나와 스치듯 은은하게 풍기는 니치 향수의 잔향만으로도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뿜어내는 이들을 은연중에 구분해 내곤 한다. 전자가 단기적인 자본으로 취향을 ‘구매’하려 한 결과라면, 후자는 태어난 순간부터 공기처럼 호흡하며 고도로 정제된 감각을 체화해 낸 아비투스가 발현된 결과이다.



선민의식과 스노비즘



이러한 아비투스의 이면에는 타인과 나를 철저히 분리하고자 하는 인간의 노골적이고도 원초적인 ‘구별짓기의 욕망’이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 특정 취향을 공유하는 소수의 바운더리 안에서는 그들만의 은밀하고 끈끈한 연대감이 형성되지만, 동시에 그 높고 견고한 문턱을 넘지 못한 바깥의 사람들을 향해서는 ‘교양 없는 타자’로 깎아내리고 배제하는 선민의식이 독버섯처럼 피어난다. 취향이 타인과 나를 나누는 하나의 거대한 성벽이자 계급장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특히 모든 것이 기호화되어 소비되는 오늘날, “나는 대중의 얄팍한 유행에 휩쓸리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취향은 자신을 방어하고 타인을 찌르는 하나의 날카로운 무기가 된다. 자신이 진정으로 그 예술의 본질이나 문화를 이해하고 사랑해서가 아니라, 단지 남들과 다른 우월한 위치에 서 있다는 안도감을 얻기 위해 난해한 문화를 억지로 소비하는 ‘스노비즘(Snobbism, 속물근성)’ 역시 정확히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속물들에게 취향이란 순수한 기쁨의 발현이나 아름다움에 대한 진지한 탐구 과정이 아니다. 진정한 하이엔드(High-end)의 가치는 사물이 가진 고유한 철학과 나의 내면이 맞닿는 고요한 조화로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오직 ‘아무나 쉽게 가질 수 없음’이라는 배타성에만 병적으로 집착한다. 이들에게 문화와 예술은 자신의 계급적 우위를 타인에게 끊임없이 확인받고 과시하기 위해 온몸에 두르는 화려한 포장지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그 화려한 포장지 속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안타깝게도 그 속은 사물에 대한 진정한 감동이나 주체적인 안목 대신, 타인의 시선에 대한 강박과 빈곤한 허영심으로 텅 비어 있기 십상이다. 타인을 깎아내리고 배제함으로써 나의 우월함을 증명하려는 이러한 얄팍한 태도 속에는, 우리가 타인과 세상을 대하며 마땅히 지녀야 할 ‘취향의 윤리’가 완벽하게 결여되어 있다. 타인을 향한 우월감으로 쌓아 올린 껍데기뿐인 우아함은, 결국 자기 자신마저 그 얄팍한 기준 속에 옥죄는 가장 천박한 굴레가 될 뿐이다.



취향은 상상력의 산물 ‘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부르디외의 서늘한 진단처럼, 평생 계급과 환경이 결정해 준 취향의 견고한 굴레 속에서 수동적인 소비자로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마치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궤도를 도는 행성처럼, 주어진 심미적 한계 안에서만 안주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결코 그렇게 믿고 싶지 않다. 아니, 단호히 거부한다.


진정한 취향은 계급이 남긴 수동적인 부산물이 아니라, 개인의 고유하고 치열한 ‘상상력’이 빚어낸 가장 능동적인 산물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 그것을 온전히 향유할 넉넉한 자본이나 완벽한 물리적 환경을 가지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의 가치를 이해하고 사랑할 내면의 감각마저 영원히 박탈당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짙은 결핍은 감각을 더욱 예민하게 벼려내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진정한 취향은 내가 아직 경험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를 강렬하게 동경하고, 때로는 척박하고 건조한 일상 속에서도 나만의 정제된 아름다움을 기어코 발견해 내려는 적극적인 호기심에서 출발한다.


이 호기심은 곧 삶을 대하는 하나의 거대한 상상력으로 확장된다. 내가 머물고 싶은 공간의 공기와 여백, 내 피부에 닿는 사물의 촉감, 내 삶을 채우는 향기와 문장들을 머릿속으로 정교하게 시뮬레이션하며 자신만의 확고한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의 한계에 갇히기를 순순히 거부하고, 한 번도 닿아본 적 없는 세계를 향해 기꺼이 손을 뻗는 내면의 용기이자 역동적인 창조 행위다.


결국 우리의 고유한 취향을 완성하는 것은 부모의 직업이나 통장의 잔고 같은 외부의 지표가 아니다. 세상을 어떤 질감으로 감각할 것인가, 어떤 아름다움을 내 곁에 두어 나의 일상을 단단하게 가꿀 것인가를 끊임없이 묻고 탐구하는 치열한 삶의 태도가 취향을 완성한다. 남들이 정해놓은 값비싼 정답이나 요란한 유행을 좇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심미적 기준을 세우고 그것을 묵묵히 밀고 나가는 고집스러움. 그 단단한 태도 속에 담긴 것이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취향의 윤리'일 것이다.


취향은 태생적으로 주어지는 혜택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을 기꺼이 하나의 예술로 만들고자 하는 자가 끊임없이 상상하고, 기어이 쟁취해 내는 가장 찬란한 전리품인 것이다.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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