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오지랖은 왜 사라지지 않는가?

오지랖의 윤리학 1

by 김삼월

인간은 끊임없이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사회적 동물이다. 그 관계망 속에서 우리는 종종 타인의 삶에 깊숙이 관여하고자 하는 강렬한 유혹에 빠진다. 흔히 ‘오지랖’이라 불리는 것은, 겉으로는 정(情)이나 관심이라는 따뜻한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지극히 권력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욕망이 똬리를 틀고 있다.


개인주의가 고도화되고 각자의 라이프스타일이 존중받는 현대 사회에 이르러서도, 오지랖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그 형태만 교묘하게 바꾼 채 우리의 일상을 여전히 배회하고 있다. 도대체 오지랖은 왜 이토록 끈질기게 살아있는 것일까? 우리는 왜 타인의 삶을 그냥 내버려 두지 못하는 것일까?



오지랖은 왜 사라지지 않는가?



우리는 흔히 ‘오지랖’을 선의의 발로라고 착각한다. 오지랖을 길을 잃은 사람에게 방향을 알려주거나, 어려움에 처한 이를 돕는 숭고한 ‘이타심’과 동일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타심’과 ‘오지랖’은 그 출발점과 목적지가 완전히 다른 것들이다. 이타심은 철저히 타인의 필요와 고통에 감응하는 수동적이고 헌신적인 태도이지만, 오지랖은 자신의 기준을 타인에게 투사하는 능동적이고 공격적인 태도이기 때문이다.


“오지랖은 타인을 위한 행동이 아니라, 타인을 매개로 한 자기 취향의 행사다.”


오지랖을 부리는 주체는 표면적으로 “다 너를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그 주체의 무의식에는 타인을 자신의 가치관을 증명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시키려는 의도를 깔고 있다.


현대인들은 각자가 자신의 신념과 자신의 선택에 대해 끊임없이 회의하고 불안해한다. 내가 선택한 직업, 내가 고른 배우자, 내가 결정한 삶의 방식이 정답인지 아닌지를 확신하지 못하기에, 이를 확인받고 싶어하는 욕구가 내면에 자리잡게 된다. 이때 타인의 삶은 자신의 선택이 옳았는지를 확인하는 훌륭한 거울이 된다.


자신의 삶의 방식이 맞다는 확신을 얻기 위해, 현대인들은 나와 다른 방식으로 살고 있는 타인을 자신의 방식대로 ‘교정’하고 싶어한다. 타인이 나의 조언을 받아들여 ‘결국’ 내가 교정해준 방식대로 살아갈 때, 나의 취향과 가치관은 승리하게 된다. 그리고 그 승리는 개인의 삶의 방식에 어떠한 정당성을 부여한다.


결국 ‘오지랖’은 가장 강력한 형태의 자기애적 만족감을 제공한다. 이 달콤한 자기 증명의 유혹을 떨쳐내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그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취향의 폭력적 확장



오지랖을 정확히 정의하기 위해서는 먼저 ‘취향’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 흔히 취향이라고 하면 짬뽕과 짜장면 중 무엇을 좋아하는지, 로맨스 영화와 액션 영화 중 무엇을 선호하는지와 같은 단순한 기호의 문제로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윤리학의 관점에서 취향은 이보다 훨씬 깊고 무거운 의미를 지닌다.


취향은 단순한 선호가 아니다. 그것은 ‘이렇게 사는 게 더 낫다’는 미적 판단. 그리고 윤리적 판단의 총체다.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음식을 먹으며, 어떤 사람과 관계를 맺고, 주말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결정하는 모든 순간에는 “이것이 더 가치 있고 아름다운 삶이다”라는 무의식적인 판단이 깔려 있다.


“오지랖이란 타인의 삶에 자신의 취향을 개입시키려는 충동이다.”


여기서 오지랖의 폭력성이 발생한다. 오지랖은 “나는 이렇게 사는 게 더 낫다고 믿는다”라는 개인적인 판단에 머무르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는 이렇게 사는게 더 낫다고 믿으니, 당신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강압적인 형태로 변모한다. 자신의 취향을 타인에게 주입하려는 시도는, 본질적으로 자신의 가치 체계가 타인의 가치 체계보다 우위에 있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한다.


“너는 틀렸고, 내가 옳다”, “너의 삶의 방식은 열등하며, 나의 삶의 방식이 우월하다”는 무언의 메시지가 오지랖이라는 포장지를 쓰고 상대방의 심장에 꽂히는 것이다.



취향은 어디까지 허용되는가?



그렇다면 인간은 자신의 취향을 영원히 침묵 속에 가둬두어야만 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취향을 형성하고 향유하는 것은 인간이 누려야 할 가장 기본적인 자유이자 기쁨이다. 그렇지만 문제는 그 취향이 타인과 만나는 접점에서 발생한다. 나는 취향을 두 가지 영역으로 엄격하게 분리한다.


첫째는 ‘자기완결적 취향’이다. 이것은 철저히 자신의 울타리 안에서 시작되고 끝나는 취향이다. 어떤 패션 스타일을 즐기는지, 주말에 집에서 어떤 요리를 해 먹는지, 어떤 음악을 들으며 휴식을 취하는지와 같은 개인의 라이프스타일 전반이 여기에 속한다. 이러한 자기완결적 취향은 타인의 삶에 물리적, 심리적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무한한 자유가 보장된다. 이는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할 것이다.


둘째는 ‘확장적 취향’이다. 취향이 자기완결성을 잃고 타인의 영토로 넘쳐흐를 때를 말한다. 타인의 옷차림을 평가하고 교정하려 하거나, 타인의 연애나 결혼관에 자신의 기준을 들이대며 훈수를 두는 행위가 대표적이다. 모든 오지랖은 바로 이 확장적 취향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윤리적 취향인은 이 두 영역 사이에서 명확한 원칙을 세울 수 있어야 한다.


첫째. 표현은 전면적으로 허용한다. “나는 이 책이 정말 좋더라“, ”나는 이런 스타일의 옷을 입을 때 편안함을 느껴“와 같이 자신의 취향을 그저 내보이는 행위는 절대적으로 허용된다. 이는 세상을 다채롭게 만드는 건강한 소통의 방식이다.


둘째. 설득은 조건적으로만 허용한다. “이 방법이 더 효율적인 것 같은데, 한 번 시도해 볼래?”와 같은 권유는 상대방이 조언을 수용할 의사가 있고, 거절의 자유가 완벽하게 보장된 수평적 관계에서만 제한적으로 허용된다.


셋째. 개입 혹은 교정은 허용하지 않는다. “그렇게 입지 마, 촌스러워“, ”결혼은 무조건 해야 정상이야“와 같이 타인의 선택을 부정하고 자신의 취향을 강제하는 행위는 폭력이다. 아무리 선의로 포장되었다 하더라도 이는 허용될 수 없다.


결국 “취향은 표현될 수는 있지만, 개입될 수는 없다.”는 원칙은 지켜져야한다.



성숙한 취향은 개입하지 않는다



결국 오지랖의 문제는 취향의 성숙도와 직결된다. 취향은 그 깊이와 넓이에 따라 미성숙한 단계와 성숙한 단계로 나눌 수 있다.


미성숙한 취향을 가진 사람은 끊임없이 밖으로 향한다. 자신의 취향이 확고하지 않고 내면이 빈약하기 때문에, 타인에게 자신의 방식을 주입하고 동의를 얻어냄으로써 불안을 잠재우려 한다. 이들은 다름을 틀림으로 인식하며, 세상이 하나의 단일한 색채(자신의 취향)로 통일되어야만 안도감을 느낀다. 이들에게 타인은 정복하고 개조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그렇지만 성숙한 취향은 차이를 견딘다. 오랜 시간 고민하고 가꾸어 온 깊이 있는 취향, 즉 성숙한 취향을 가진 사람은 타인의 삶에 섣불리 개입하지 않는다. 자신의 내면에 견고하게 지어진 성이 있기 때문에, 타인의 성이 나와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로 불안해하지 않는다. 이들은 차이를 위협으로 느끼는 대신, 세상에 다양한 취향이 공존한다는 사실 자체에서 경이로움과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성숙한 사람은 누군가 자신과 전혀 다른 삶의 궤적을 그릴 때, 그 궤적을 수정하려 들지 않고 그저 묵묵히 관찰하며 미소 지을 뿐이다. 그들은 안다. 한 인간의 삶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우주이며,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침범해서는 안 되는 신성한 불가침의 영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는 이제 얄팍한 선의로 포장된 오지랖의 시대를 끝내고, 서로의 고유한 결을 존중하는 적정 거리의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때로는 외롭고 낯선일이겠지만, 개인의 존엄을 지켜내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할 문명적 성숙의 과정이다.


내안의 취향이 진정으로 뿌리를 내리고 단단해지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타인의 삶을 향해 손가락질하거나 훈계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나를 증명하기 위해 타인을 깎아내리거나 교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타인을 나의 잣대로 재단하려는 모든 시끄러운 시도들이 침묵으로 가라앉은 자리에는, 오직 자신을 향한 깊은 긍정과 타인을 향한 조용한 존중만이 남게될 것이다.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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