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편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박이 Dec 27. 2023

조급한 후배에게 보내는 편지

현시대를 살아가는 디자이너에게 보내는 위로

어느 날 후배 이름님이 내게 물었다.


'선배님은 초반에 힘들게 일해서, 지금 일을 잘하시는 거겠죠?'


나는 힘들고 바쁘게 살았다. 주 4일 근무 시행 이야기가 나오는 21세기에 주 6일을 근무를 하는 스타트업에서 사회 초년생을 시작했었다. 힘들게 살아온 시간에 대한 보상으로 연차에 비해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넓었고, 그 덕분에 꽤나 자주 듣던 질문이었지만 후배 이름님에게서 이 말을 들어 기쁨과 슬픔, 상반된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먼저, 기쁜 이유는 나 자신이 '후배가 편하게 질문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구나.'라는 안도감 때문이었다.


꽤 오래전, 갓 성인이 되어 만났던 나의 첫 사수는 너무나 지독한 사람이었다. 벼랑 끝에 몰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도움을 청했을 때, 내 첫 사수는 도와주기보단 나를 버리기를 택했던 사람이었다.

 그 지독했던 사람이 너무 미워서, ‘첫 사수에 대한 복수 방법’으로 ‘후배를 알뜰살뜰히 챙기는 사람’이 되는 쪽을 택했다.

같은 환경에 있어도 너와는 다른 사람이 될 것이라고. 너의 선택만이 정답이 아니었음을 증명해 내리라 다짐했다. 내가 후배들보다 연봉을 조금 더 받는 대가도 후배의 한숨과 짐을 가져오기 위함이라 생각하며, 후배의 고민과 일을 기꺼이 가져올 수 있는 사람이 되려 했다.

 그래서 그날 후배의 질문이 내 오랜 다짐에 대한 결과치로 돌아온 날인 것 같아 좋았지만 곧바로 슬퍼졌다. 정확히 말하면 속이 상했다.


 후배 이름님과 같이 일을 한지 일주일이채 안된 날. 섣부를 수도 있지만 이름님은 무슨 일을 해도 잘 해낼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경력에 비래 업무가 능숙하고, 일의 핵심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으로 모자라 핵심을 파고드는 집념과 끈기를 가진 사람이었다. 쉽게 말해 너무 탐나는 인재였다. 이 탐나는 인재, 후배 이름님이 ‘본인 업무 능숙도에 대한 확신’이 없어 보이는 생각을 하며, 본인 속마음을 잘 뱉지 않는 후배가 내게 말을 전할 때까지 꽤 오랜 시간 고민 했을 것을 생각하니 속이 상했다. 그런 고민을 하지 않게끔 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 주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미안하기도 했다.


그날 나는 후배에게 ‘너무 잘하고 있으니 걱정 말라.’는 꽤나 상투적인 위로를 보냈다. 무거운 질문에 대한 답을 해주기에 나는 너무 가벼운 사람이었다. 지금 애매모호하게 답을 해줄 바에 이번에는 가볍게 넘기고, 나중에 시간을 내서 답해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후배의 질문에 답을 해준 건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바로 내 퇴사날이었다.

아끼던 후배의 질문을 퇴사날이 되어서야 답을 해주다니!

좀 더 일찍 답을 해주었어야 했는데, 생각이 많은 선배를 두어 이름님이 끝까지 고생했다는 생각에 또 한 번 미안한 마음이었다. 후배 이름님은 내 글씨체를 좋아했다. 트레싱지에 대충 휘갈긴 글씨를 보면서도 글씨가 나를 닮아 좋다며 배시시 웃는 사람이었다. 배시시 웃던 이름님의 미소가 떠올라 작은 선물과 함께 정성스럽게 손 편지를 썼다.



후배 이름님에게

원래 찬찬히 시간 들여서 대답해주려고 했는데, 이별이 가까우니 저번에 물어본 거 답해주려고요.
이름님이 저한테 '초반에 힘들게 일해서 지금 일을 잘하게 된 거 아닌가요?'라고 물어봤었잖아요.

인생은 긴데, 저는 초반에 너무 달렸어요.
숨이 턱까지 올라오고, 입에서 피맛나도 '괜찮아요~ 할 수 있어요' 하고 달렸어요. 그래야 되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면서 나름 괜찮아지는 것 같은 저를 보며 위안하며, 더 저를 버리며 일했어요.

사실 오래전부터 주변에서도, 그리고 제 몸도 그만하라고 많이 얘기해 줬는데 저 스스로 그만두지 못했어요. 하니까 된다는 것을 증명해 내는 데에 몰두해 있었고, 미래가 안 보이니 현실의 나를 지키지 못하면서 '지금 당장'에 미쳐 더 목메며 지냈거든요. 가끔은 오만해져서 안된다고 하는 건 안된 사람의 핑계라고도 생각했어요. 그러다 이 상황이 됐고요.(나는 건강이 많이 악화되었다.)

빨리 달리는 게 중요하지 않아요. 오래 달려야지, 빨리만 달리면 저처럼 쉽게 경로를 벗어나게 됩니다. 경로를 벗어난 걸 알아도 이미 가속도가 붙어서 속도를 줄이는 것도 오래 걸리고, 잘못된 길로 멀리 가있게 되고요.
제 말이 지금은 이해가 잘 안 되겠죠. 현재가 계속 불안하니까. 그런데 지금은 그냥 그럴 시기이니까 본인을 의심하진 않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회사 다니면서 제 위치를 계속 의심하고 불안해했어요. 그래서 새로운 사람들이 오면 제 자리가 위험하다는 생각을 아주 많이 했고요. 지금 이름님이 보기에 이상하고 쓸데없는 고민을 한 것 같죠? 근데 그랬어요. 꽤 오랫동안. 그런데 결국 그 시기를 지나니까 점차 괜찮아지더라고요. 가끔은 지나야 보이는 것들이 있는 것 같아요. 그냥 시간이 조금 필요한 것이겠지요.

(중략)



창피하고도 솔직한 마음을 담은 편지를 후배에게 전달하는 것을 끝으로 나는 회사를 나오게 되었다.

이 편지를 쓸 때는 후배의 마음이 평화로워지길 바라며 썼다. 연차가 많이 차이나는 선배가 아니기에 더욱더 그 불안한 마음을 잘 알아서, 조금 앞선 사람으로서 후배를 다독여주기 위해 적었다.


 하지만 이 편지에서 후배의 이름을 내 이름으로 바꾼다면, 이 편지는 결국 내가 나에게 쓴 편지가 되어 돌아온다.

사람들은 항상 불안해하고 고민하며 살아간다. 가끔은 타인에게서 정답을 찾을 때도 있지만, 나의 경우 보통 과거의 나에게서 정답을 찾기도 한다. 어려운 상황 속 모두에게 위로가 될 말인 것 같아서 오래 묵혀둔 쿰쿰한 편지를 보낸다.


모두들 본인 스스로 의심하지 말자. 우리에겐 잠깐 시간이 필요한 것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보다 나이 많은 내 동생에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