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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rene Sep 30. 2024

눈 내리는 깊은 밤에

<삶의 한 순간을 - 함께 사는 세상> 가치관과 삶

▲  추억의 야간스키장  © https://www.yongpyong.co.kr






내 어릴 때 별명이 ‘추월이’였다. 사전적 의미가 아니라 ‘추워, 추워’를 입에 달고 살아서 불려지던 별명이다. 손발이 유난히 차가워서 찬물을 만지면 통증이 느껴져 힘들었다. 청년시절에는 ‘차가운 여자’가 되어 한 여름에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함께 활동하던 외국인 친구가 내게 ‘뱀파이어’ 같다고 했다가 등짝 스매싱(!)을 당하기도 했다. 그들에게 뱀파이어는 피가 차가운 존재라는 생각이 있어 그리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40대가 지나면서 땀이 흐르기 시작하더니 결국은 정반대의 체질로 바뀌고 말았다. 강산이 수차례 바뀌는 동안에도 나는 여전히 ‘뜨거운 여자’가 되어 지내고 있다. 마른 체형의 몸무게는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짐이 없다. 진종일 에어컨 바람이 필요하고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흘러 활동이 힘들어진다. 다른 가족은 겉옷을 걸쳐야 하는 불편함 때문에 생활공간을 분리할 수밖에 없다.


거실 구석을 장식하고 있는 스키를 보면서, 옛날 눈 내리던 겨울 스키장을 생각한다. 추월이 시절에도 젊음이 있으니 인파가 조금 적은 야간 스키장을 찾아가곤 했다. 젊음은 그렇게 일도, 운동도 무엇이든 한계를 극복하며 도전할 용기를 갖게 하는 원동력이다. 


▲  추월이를 이기는 젊음  © Kyrene


나의 스키가 생각을 할 수 있다면, 스키 슬로프를 내달리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할까 싶다. 주인장은 이제 행여 골절사고를 당할까 염려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는데 말이다.


더워서 아우성치던 여름이 하룻밤새 가을공기에 밀려나고 말았다. 뜨거운 여자가 된 지금, 마음만큼은 눈 내리는 깊은 밤의 슬로프를 내달리고 싶다. 젊음은 노년에게 자리를 내어준 지 오래인데 마음은 도무지 나이들 줄을 모른다.


신체가 늙어감에 따라 할 수 있는 일이 점점 줄어들고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자꾸 늘어난다. 그래도 나이 들어가는 것이 그다지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겪어온 고통, 삶의 목표와 추구하는 가치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피할 수 없었던 번민과 고뇌와 갈등은 어느덧 모두 희미하게 사라져 간다.


존재만으로도 반짝거리고 풍요로웠던 젊음, 그 가운데서 우리를 지지해 준 낭만과 추억과 그리움만 남아있다. 나이 들어가는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여유로움이다. 오늘도, 건강하고 무탈한 하루가 기적처럼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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