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한 순간을 - 함께 사는 세상> 가치관과 삶
▲ 앙상한 가지 위에 단풍 대신 햇살 © Kyrene
적응력 탁월한 인간들은 지난여름의 뜨거운 열기를 나름대로 잘 버텨내고, 하룻밤 새 슬며시 찾아든 서늘한 밤공기에 가을을 실감한다. 강산이 수~~~ 차례 변하는 동안, 수없이 많은 가을을 보냈다. 하지만 2024년 10월, 가을은 실종되고 뜬금없이 봄과 겨울을 만난다.
밖에 나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창밖으로 바라보기만 했던 강변 산책길이다. 햇살이 순해지는 저녁나절 오랜만에 산책길에 나선다. 이른 봄부터 화려한 꽃 길을 열어주고, 무성한 초록으로 여름을 시원하게 해 준 벚나무의 붉어진 가을색을 기대하며 가을 산책의 첫날을 시작한다. 벚나무는 원래 선명한 빨간색 예쁜 단풍을 자랑하는 수종(樹種)이다.
산책로에 줄지어 서있는 벚나무를 보는 순간 발걸음이 저절로 멈춰진다. 지난봄, 밤새 사라져 버린 야생화 밭을 마주하던 때가 떠오른다(참조: https://brunch.co.kr/@kyrene/35). 10월의 시작 가을 초입(初入)이다. 붉은 단풍을 기대하던 내 눈앞에는 한 겨울을 상징하는 벌거벗은 나목뿐이다. 마지막 잎새마저 남아있지 않다. 바닥에 나뒹구는 낙엽들도 바싹 마르다 못해 타 들어간 모양새다. 가을색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도 없는 광경이 몹시 생경하다.
인간들이 ‘더워 죽겠다’고 아우성칠 때, 산천초목들이 뜨거운 열기로 얼마나 극심하게 몸살을 앓았는지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고통은 자업자득(自業自得)이다. 자연이 무너지는 상황은 어쩔 것인가!
지구촌 곳곳에서 발생하는 기상이변, 기후위기는 먼 나라 얘기가 아니다. 지금 바로 내 곁에서 이미 진행되고 있음을 내 눈으로 확인하는 중이다. 이상한 현상은 겨울 같은 앙상한 나뭇가지 만은 아니다. 벚나무 고목 옆구리에서 새싹이 돋아나고 있다. 뜨거운 햇살을 많이 받는 쪽의 나무에는 거의 모두 메마른 가지와 함께 새순이 자라고 있는 것이다.
곡식이 익어가는 풍요로운 햇살이 아니라 타들어 오는 뜨거움에 맥없이 져버린 이파리들, 열대야를 밀어내고 느닷없이 몸을 감싸는 차가운 밤공기에 생태계의 질서를 잊어버린 모양이다. 돋아나는 새순 옆에서는 가녀린 벚꽃송이가 피어나고 있다. 추운 겨울을 잘 견디고 봄을 재촉하며, 눈 속에서 꽃망울을 터트리는 개나리꽃을 반기는 마음과는 사뭇 다르다. 나로서는 처음 보는 시월의 벚꽃이다. 한 송이 두 송이 작은 꽃잎을, 시커먼 고목의 몸통에 의지하며 간신히 매달려 있는 초가을의 벚꽃이 서글프다.
붉은 단풍 옷을 입고 가을이 한창이어야 할 벚나무는 가을은 상실한 채, 겨울과 봄사이에서 익숙하지 않은 모습으로 어색하게 서 있는 듯이 보인다. 기상전문가는 어쩌면 이번 여름이 가장 시원한 여름으로 기억될지 모른다고 한다. 두려운 마음이 일어난다.
바라건데, 올해의 가혹한 경험이 ‘생존능력’이 되어 내년에는 본래의 빨간 가을색을 되찾게 되길 미안한 마음을 담아 진심으로 빌어본다. 깊은 겨울과 때를 잊은 봄 가운데 서 있는 가을의 벚나무가 애처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