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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약돌 Apr 07. 2024

12화. 정의란 무엇인가

11. Justice

  이클 센델의 유명한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가 세계를, 특히 한국을 강타한 시기가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 사람들이 얼마나 정의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제게 ‘정의’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은 고결하고, 단단한 다정함입니다.

  오랜만에 본업 이야기로 돌아가볼게요.  저는 교실과 교육이야말로 정의가 살아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려면 교실 공동체가 합의를 이루어야 하지요. 학생들에게 정의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던지면,  보통 평등, 공평 등의 언어를 사용하여 자신들이 이해하고 있는 정의의 개념을 설명합니다. 일에 따라서는 인과응보, 대우에 따라서는 모든 이가 공평한 상태, 자기가 한 일에 적합한 보상을 받는 것 등 말이지요. 하지만 이 정의라는 개념이 조금씩 다르게 정립되어 있으면 매우 불편한 상황이 생깁니다. 다른 이에 대한 배려가 필요한 상황에서 불공평을 외치기도 하고, 원인과 과정보다는 단순히 결과에 의해 일을 판단하게 되는 경우도 생깁니다. ‘정의로운 교실’을 만들려다가 되려 ‘정의롭지 못한 교실’이 되어버리는 것이지요.  

  정의는 무엇일까요? 사전적인 의미로는 1.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  2 바른 의의(意義), 3. 개인 간의 올바른 도리. 또는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공정한 도리.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여기서의 ‘도리’는 사람이 어떤 입장에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바른길을 의미합니다.

  사전적 의미에서는 정의를 정의(定義)하는 단어로 ‘평등’이나 ‘공평’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공정하다고 명시되어 있지요. 모두가 정의의 의미와 실천에 공감하지만 문제가 되는 구간은 결국 ’ 공정함‘입니다. 공정하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거든요. 이성과 감성의 완벽한 중립 상태! 정의는 한번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자꾸만 더 높은 단계를 추구하는 형태를 띄어야 합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 교실에서의 ‘정의’ 만큼은, 이성과 감성의 중립에서 벗어나 조금은 ‘따뜻함’쪽에 기울기를 소망합니다. 물론 그것이 지나치면 동정이나 수혜자마저 불편한 차별이 될 수 있기에 이 조금에 대한 논의를 꽤 진중하게 하는 편입니다. 그러다 보면, 정의에서 시작한 토의는 ‘진리’혹은 ‘비전’까지 도달하게 됩니다. 매년 느끼는 것은, 집단마다 이 ‘진리‘가 무척 유사하면서도 조금씩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공통의 진리를 가지고 있는 공동체는 갈등에 건설적으로 대처하는 훌륭한 길잡이 별을 가지고 있는 셈이지요.

공리주의적 관점, 평등적 자유주의적 관점(롤스), 자유 지상주의적 관점(노직), 공동체주의적 관점(매킨타이어) ㅡ 의 '반성적 평형'을 통해, 각 공동체와 그 구성원들은 '어떤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우리 사회를 더 좋게 만들어 줄 것인가'에 대해 결정해야 한다. 이렇게 공공선(도덕)을 고민하는 시민들의 정치 참여가,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사회를 개선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시민 의식을 만들어 내며, 그 사회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마이클 센델]

 



  오늘의 카드는 11번 ‘정의’입니다. 11이라는 숫자를 1+1로 바꾸어보면 숫자 2가 나옵니다. 메이저아르카나 2번은 바로 여사제이지요.

  여사제카드와 정의카드는 무척 비슷한 느낌입니다. ‘법에 따른다는 것’이 특히 그렇지요. 다만 여기에서 차이점이 있다면, 여사제 카드는 신의 법을 따르며 선과 악의 본질적인 판결을 스스로 내리지 않습니다. 그러니 형벌을 내리는 것도 그녀의 몫이 아니지요. 반면, 정의 카드는가 따르는 법은 ‘인간의 법’입니다. 그 손에 들고 있는 칼과 저울은 바로  법에 따라 공평하게 판결하고 벌을 내리겠다는 의미를 보여줍니다. 법을 어긴 인간에 대한 판결은 물론 형벌까지 그의 몫입니다.

  정의 카드를 만나면 실제로 법적인 문제까지 갈 수 있는 갈등이 있거나, 법정 다툼을 하는 경우일 때가 많습니다. 혹은 어떤 사건에 대해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서도 등장하기도 합니다. 이 카드의 속성처럼 공평하게, 그러나 냉정하게 일은 처리될 것입니다. 여기서는 신뢰, 중립, 공정, 올바름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요. 하지만 또 어떤 경우에는 그도 인간이라는 것이 약점이 되기도 합니다. 불공정, 선입견, 편파, 독단 등을 나타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이 카드는 반드시 유죄와 무죄를 선고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법 집행관처럼 정돈된 마음 상태에서 자신의 문제에 균형을 이루어나가려는 내담자의 마음가짐을 요구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어떤 문제에 대한 단순한 보복성 처벌이 아닌 미래를 내다보는 교화 그리고 무엇보다 피해에 대한 전폭적인 회복 지원이 정의가 존재하는 이유니까요.

 


일반적으로 알려진 정의의 여신상의 모습(좌)과 대한민국 정의의 여신상(우)

  ‘정의의 여신’의 역사

  정의의 여신의 고대 이집트의 마아트(Maat)에서 기원하여, 그 후 그리스의 여신 디케(Dike)의 모습으로 그려졌는데 디케를 상징하는 모습을 표현할 때 칼만 쥐고 있는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로마로 전해지면서 디케에 균형과 형평성이라는 덕목을 더하게 됩니다. 그 후 오늘날의 유스티치아(Justitia)가 탄생하게 됩니다. -정의(Justice)란 단어가 여기서 생겨난 거지요.- 이 유스티치아는 칼과 저울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저울은 법의 형평성을, 칼은 엄한 법 집행을 표현합니다. 덧붙여서 어떤 여신상은 눈가리개를 두르거나, 눈을 감고 있기도 합니다. 이는 판결에서 주관을 배제하고 공정하게 임하겠다는 뜻 입니다만, 어떤 설화에서는 디케의 진실의 눈을 가려서 오히려 판단을 흐리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는 만큼, 정의의 여신상은 문화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존재의 의미는 모두 같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정의의 여신상은 우리 전통 의복인 한복을 입고 자리에 앉은 채로, 눈을 가리지 않고 칼 대신 법전을 들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 모습이 무척 마음에 듭니다. 한복을 입은 것도 그렇고요, 칼보다는 법전을 든 손도 말이지요. 우리나라 정의의 여신상이  눈을 가리지 않은 이유는 법전을 정확하게 읽고, 그에 따라서 공명정대하게 판결을 내리겠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언제나 그와 같은 판결이 이루어지는 세상이 되면 좋겠습니다.




                                                                          정의 : 공정함, 조정, 균형, 분별력/ (역) 불공정, 선입견, 부도덕, 편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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