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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경 Feb 25. 2024

영원에 깃든 찰나의 시간

‘헤어질 결심’과 ‘순간의 철학’ 사이에서

  영화 ‘헤어질 결심’을 다시 시청하고 느낀 압도적인 감정을 꼭 글로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것을 온전히 나타내주는 표현들을 찾지 못했기에 선뜻 그러지 못했다. (압도적이라는 표현 역시 overwhelming을 번역하여 사용한 단어이기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의 라이브러리에서 이미 한 번 꺼내본 적이 있는 작품이지만 당시에는 충분히 느끼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나중에 꼭 다시 봐야지 다짐했었고, 역시나였다. 나는 그 사이에 또 컸나 보다.


  ‘헤어질 결심’의 각본을 맡은 정서경 작가는 ‘알쓸인잡’에서 사랑한다는 말이 등장하지 않는 사랑 이야기가 쓰고 싶어 시작된 영화라 언급한다. 그 이유로는 고백 장면을 쓰는 것이 너무 힘들어 싫다고 얘기하는데, 사랑이란 감정은 동기화되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 알 수밖에 없을뿐더러, ‘사랑해’라는 말에는 실체가 없다고 덧붙인다. 그녀가 무얼 이야기하고 싶은지 알겠으면서도 선뜻 동의할 수는 없었던 이유가 뒤이어 나온다. 사랑한다는 말을 직접적으로 내뱉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김상욱 교수의 말과, 개념 전달이 아닌 감탄사로 사용될 수도 있다는 이호 박사의 말은 영화만큼이나 큰 울림을 갖고 있다. 아, 감탄사의 형태라니. 당신을 너무나 사랑하는 내 안의 감정이 나의 몸 밖으로 나오려는 것을 참지 못하여 속절없이 튀어나오는 감탄사의 형태라니.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기를 어려워하는 이유는,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영원은 찰나에 깃들어 있기도 하다.’ 함돈균의 ‘순간의 철학’에 나오는 문장이다. 그는 다양한 시간의 단위를 소개하는데 그중 ‘겁’과 ‘찰나’의 개념과 설명을 빌려왔다. 영겁은 시간 단위로 쓰이는 말 가운데에서 가장 긴 것이며 영원한 겁 - 하늘이 시작되고 우주가 꺼지는 동안 - 을 뜻한다. 이때 ‘겁’을 현대물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빅뱅의 시간 단위인데 우주의 나이가 138억 년 정도로 추정되는 것을 보았을 때, 우주는 아직 꺼지지 않았으므로, 한 겁이 되지 않는다. 또, 찰나는 (많은 생략을 하였지만) 10의 -43 제곱 초라 주장한다. 인간의 평균 수명을 80세라고 가정했을 때, 138억 년의 시선으로 한 인간의 생은 찰나의 반쯤에 가까우며, 한 사람을 사랑하는 시간은 찰나에 무척이나 가깝다고 얘기하는 것이 무리가 아니겠다.


  찰나를 사는 인간이 더 짧은 찰나의 시간 동안 사랑에 빠져 영겁의 시간 동안 다른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그 무엇보다 경이롭지 아니한가. 박찬욱 감독은 ‘결심’이라는 단어를 통해 헤어짐이 실패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다고 밝힌 적 있다. 서래는 헤어지는 방법을 모르기에 그의 바람대로 해준과 헤어지는 데는 실패했을지 모르지만 그녀는 해준의 미결 사건이 되어 끊임없이 떠오르며 영겁의 시간 동안 함께할 것이다. 마침내.


/2024.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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