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골라주는 것은 연애라고 했던가. 나는 어제 그에게 나의 책장에서 배수아의 책을 골라주었고, 그는 나의 책장에서 배수아를 빌려 갔다.
예쁘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생겼다. 큰 키에 마르지 않은 체격을 가진 그가 너무나 예뻐 보이기 시작했다. (나에게 ‘이쁘다’는 외모를, ‘예쁘다’는 한 사람의 가치관이나 분위기를 표현하는 형용사이다. 둘은 확연히 다르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는 친절했고, 내가 음대를 졸업한 것을 알고는 음악에 대한 관심과 함께 꽤나 심도 있는 음악적 질문들을 하기에 나는 체험 과외를 해주겠다며 그를 집으로 초대했다.
베이스부터 화성학까지 혼자 공부해 온 사람이라 처음부터 시작했는데 무언가를 알게 되면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듯 보였다. ‘잠시만요.’라는 말과 함께 4-5분의 시간을 혼자 생각한 뒤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는지 나에게 확인받는 모습이 얼마나 예뻐 보이던지. 그는 그렇게 그동안 혼자 궁금해 해 온 것들을 물어보기도 했고, 음악 관련된 잡담을 하며 한 네다섯 시간쯤 지났으려나,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잠시 자리를 떴다. 다녀오면 슬슬 갈 준비를 할 줄 알았는데 레코드플레이어 앞을 서성거리길래 틀어봐도 된다고 작동하는 법을 알려주었고, 책장을 기웃거리기에 책 얘기도 했다.
혹시 책을 읽을 때 형광펜으로 칠하며 읽냐는 그의 질문에 형광펜은 아니지만 나의 오랜 습관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흠칫 놀랐다. 알고 보니 그가 아는 나의 친구가 나에게 빌린 책을 보고 알던 거였고, 나의 책장을 본 뒤 그 책의 주인이 나겠구나 예상했던 거였다. 평소에 책을 자주 읽냐고 물어보았는데 반응을 보니 책을 즐겨 읽지는 않는 듯한 대답이었지만 책장에 계속 관심을 보이기에 읽어보고 싶으면 빌려가도 된다고 말해주었다.
우리는 나의 책장 앞에 같이 쪼그려 앉았고, 어떤 책이 있는지 훑어보는 그에게 나의 책장을 소개해주며 ‘반 고흐, 영혼의 편지’나 ‘심연으로부터’, ‘자기 앞의 생’을 추천해 주었는데 썩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눈치였다.
‘여기 두 번째 줄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배수아라는 작가의 책만 있어요. 심오하고 어려운 느낌이 있어 평소에 책을 많이 읽지 않는 사람들에겐 잘 추천해주지 않는 편이에요.’
‘부주의한 사랑’. 사랑 이야기가 읽고 싶다며 그가 고른 배수아의 책이다. 하지만 내가 붙여둔 메모지의 양을 보니 배수아의 다른 작품만큼 재미있게 읽은 것 같지 않아 ‘올빼미의 없음’을 추천해 줬고, 그는 그것을 빌려 갔다. 그는 책이 읽고 싶었던 것일까 내가 좋아하는 배수아가 궁금했던 것일까. 책을 골라주는 것은 사상을 공유하는 것이기에 연애라고 했다. 나는 나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에게 큰 영향을 미친 작가의 책을 빌려주었다. 고백하자면 나는 배수아의 책만큼은 잘 빌려주지 않는 편이다. 다른 책들을 빌려줄 때에는 그것들이 오염되거나 분실될 가능성도 어느 정도 염두에 두는 편이라 배수아의 책만큼은 빌려주고 싶지 않다. 그 사람과 나만의 추억으로 남겨두고 싶다. 그 어떤 다른 사람도 나와 그 사람의 사이에 들어오게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모든 것을 감수하면서도 내가 배수아의 작품들 중에서도 손에 꼽는 ‘올빼미의 없음’을 빌려주었다. 그와 나는 사상을, 가치관을, 더 나아가 예술을 공유하게 될까. 그 사람이 그랬듯 나도 그의 세계를 넓혀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의 세계를 넓힌다는 것은 그 사람의 남은 인생 동안 빠짐없이 생각나고 엄청난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에 두렵기도 하지만 나도 누군가의 뮤즈가 되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의 호기심 가득한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정말 본인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 갖는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점은 기특하며, ‘나의’ 배수아를 궁금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들게 한 그에게 조금은 설레었다 말할 수 있겠다.
/2024.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