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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경 May 17. 2024

타자라는 바이러스

소중함은 왜 항상 불안함을 동반할까

알게 된 지 기껏해야 한 달 정도 된 새로운 예술가 친구가 있다. 처음 만났던 날에도 끊임없이 오고 가는 대화에 밤을 꼬박 지새웠는데, 우리는 제법 빠르게 친해져 일주일에 네다섯번은 보는 사이가 되었다. 나는 그와 함께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면서 주로 예술과 아름다움에 대한 대화로 새벽을 채운다. 아름다움에 대한 그의 가치관은 너무나 확고해서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속속들이 알고 싶어 계속해서 물음표를 던지고 있고, 그런 나를 처음으로 이성적인 사람이라 생각하는 사람이다.


학교와 알바로만 이루어져 있던 나의 일상이 그로 인해 많이 바뀌었다. 자정이 넘은 시간에 대뜸 전화해 집으로 와서 밤을 새우기도 하고, 주말엔 같이 밥을 해 먹고 과제를 같이 하기도 하며, 같이 자전거로 런던 한복판을 가로질러 공원이나 갤러리에 가기도 한다. 계획에 없던 그와의 만남이 싫다는 생각이 한 번도 든 적이 없고, 밤낮이 뒤바뀐 생활을 기피하면서도 그가 다녀가면 애매해지는 하루가 싫지 않다. 아니, 오히려 그를 보지 않은 날이면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함께 지새운 많은 밤들이 그러하지만 하루는 예술 이야기로만 꽉꽉 채운 밤을 보내기도 했는데, 여러 화가들의 작품을 보여주며 터치에 따른 질감 표현이 그림의 어떤 부분에 영향을 끼치는지나 그림에서 색감이 거리와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 또는 여러 낭만 시대 작곡가들의 곡을 들려주며 그의 클래식 취향은 어떤지 알아보거나 오케스트라는 장르가 아니라 형태로 구분된다든지 등 우리만의 알아두면 쓸모 있는 신비한 잡학사전을 9시간이나 가졌다. 그는 내가 첫 예술친구라 예술과 아름다움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처음이라던데, 너무 좋다는 그의 말에 나는 선잠도 없이 학교에 가는 것이 전혀 피곤하지 않다. 그리고 그는 나와의 대화를 통해 미술 학교를 세우는 꿈에서 ‘다양한 분야의 (필자)들‘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예술을 가르치는 학교를 세우고 싶다는 꿈으로 바뀌었고, 나 역시 훗날 일자리를 얻었다. 그의 말은 앞으로 나의 예술 생활에 있어 영향을 주기도, 굳건한 버팀목이 되어주기도 할 것 같다.


짧은 시간 동안 그가 정말 많이 소중해졌다. 나의 마음속으로만 그려오던 친구가 현실에 나타나니 꽉 쥐면 터질까, 바람이 불면 날아갈까 불안하다. 한 인격체로 인해 오는 행복은 내가 통제할 수 없을 것만 같아 스스로가 한없이 나약하게 느껴진다. 몇 주 전 읽었던 함돈균의 ‘순간의 철학‘의 일부분을 다시 꺼내 읽어보았다. ‘사랑의 신비는 자기의식을 지닌 인간이라는 한 생명체의 항상성, 이 폐쇄적이면서도 자연스러운 독립심이 타자를 향해 열리는 극히 예외적 순간이라는 점에 있다. 이 시간에 개체는 타자의 관점을 자기 삶의 중심으로 삼는 기이한 경향을 감내한다. (...) 주체는 지금까지 가까스로 마련해 놓은 자기 생존의 최적성과 안정성을 느닷없는 타자가 흔들어놓는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즉 항상성의 파괴를 인지하면서도, 자기 오염이라는 위험을 기까이, 아니 어쩔 수 없이 시작한다. 사랑의 시간에 주인은 내가 아니라 타자라는 바이러스다.’ 그가 그동안 내가 가까스로 마련해 둔 자기 생존의 최적성과 안정성을 느닷없이 흔들어놓고 있고, 나는 그것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이곳 런던에 와서 나에게 안정감을 주는 환경을 겨우 구축해 두었는데 다른 무언가도 아닌 사람에 의해 흔들리기 시작하니 너무나 혼란스럽다. 영원하지 않을 걸 알면서도 이 바이러스를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바이러스에 너무나 깊게 감염되어 더 이상 나에게 남아있지 않게 되는 순간 또 한 번 엄청난 공허함을 느끼게 되진 않을까 미칠 듯이 두렵다.


그리고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하는 또 다른 한 가지는 참 자기중심적인 나 자신이다. 서로에게 서로가 참 소중해졌으면서 훗날의 스스로를 걱정하는 마음 때문에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의 마음은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다. 내가 조금은 거리를 두고 있는 게 어렴풋이 느껴질 텐데. 참 못난 사람이다.


/2024.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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