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바에서 부는 바람
불과 20분 전까지는 폭풍우가 불었다.
폭풍우가 지나간 자리는 내리쬐는 태양처럼 빛났다. 화색이 돌았다. 나는 그의 제안을 거절하면서부터 자연스레 가이드가 되어버렸다. 이 또한 당황스러웠으나 할 수 있을 거라고 자신을 믿었다. 이런 상황에 놓이면 불과 몇 년 전 아니 1년 전만 해도 득달같이 달려들어 따졌을 것이다. 생각을 더듬어봐도 그때와 달리 많이 유순해졌다. 많은 걸 내려놓으면서 자존감도 회복되고 굳건해진 거지.
새싹이 돋아나면서 모든 걸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그가 나보다 한 살이 많았기도 해서 그럴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을 했다. 사실 동행은 여러 의미에서든 양보와 배려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걸 알면서도 함께 가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최대한 즐기기로 다짐했다.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다. 여행 후반부로 갈수록 분명 말수는 줄고 다 뜯긴 빗자루처럼 멍하니 있었으니까. 나는 그가 미리 알아온 명소를 확인하고서, 가장 먼저 파도바 광장으로 향했다. 구글맵을 켜고 저장된 장소를 확인하고서야 움직일 수 있었다.
파도바 중앙 광장에는 알록달록하고 신선한 마켓이 열린다. 우린 가난한 배낭여행자로 위장하면서 실컷 구경을 하다 자리를 뜬다. 10월임에도 납작 복숭아가 있고 오렌지, 레몬, 바나나, 감자, 양파, 쥬키니까지 식재료가 다양하다. 시청과 대성당, 파도바 대학교를 끼고 있는 중앙 광장 마켓에는 온통 관광객뿐이다. 시끌벅적한 틈을 노려봄 직해 과일의 상태나 가격, 상인들을 관찰하면서 본격적인 여행이 시작된다. 까무잡잡한 상인들, 붉은색과 주황색의 그라데이션이 어여쁜 배 모양의 사과와 오렌지는 석양을 연상케 하고 핑크빛의 납작 복숭아와 보랏빛 거봉은 누군가의 화살을 맞고 멍든 가슴을 떠오르게 한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을 올려다봤을 뿐. 이곳에는 13세기부터 파도바 시의 행정 기관이 있었고 화재 이후 재건축되면서 다양한 시대를 아우르는 복합 단지를 이룬다. 시대를 간직한 건물도 프레임에 담으니 오케스트라 합주가 시작된 것 같다. 은밀하게 고요가 흐르고 사람들은 춤을 춘다. 구름의 움직임은 뻥뚤린 광장 바닥으로 가라앉고 있다. 시대를 역행하듯 그 시절 사람들을 떠올리며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그중 본새 없이 화려한 프레스코화가 장식된 궁전을 스쳐기만 하고 상아빛이 감도는 건물과 벽돌색과 황토색이 합쳐진 벽돌과 나무로 장식한 ‘팔라초 델레 디베테’가 눈에 띈다. 13세기말에 지어져 19세기까지 시립 교도소로 사용된 건축물이다. 중세시대 때 만들어진 네오로마네스크 양식의 창문을 한참을 바라보며 서있다. 흰 돌과 벽돌로 건축되고 또 복원되면서 색이 균일하지 못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경탄스럽다. 그래서 이유 없이 바라만 본다. 1층에는 상점이 있고 그 위층부터는 주택 용도로 지어진 건물이 많다. 그 용도로 지어진 건물 중 이곳이 파도바에서 최초라고. 백지상태에서 접하는 각 지역의 문화유산은 일차적으로는 심미성이 높아야 눈길을 끄는 것 같다.
그토록 찬양하는 이탈리아라니! 참으로 이태리스러웠다.
우린 보란듯이 파도바 대학교로 들어갔다. 대학생처럼 교내를 누볐다. 반짝이는 청춘을 보며 나의 사회적 위치를 생각했다.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매일 아침 출석하는 것조차 버겁고 지겨운 나는 매사 불성실한 학생이었고 덕분에 턱걸이로 졸업할 수 있었다. 노는데 정신 팔려 밥 먹고 살 궁리를 하지 못했던 시절이 스쳤다. 누군가에게 ‘화양연화’가 현실이라면, 나에게 가장 아름다운 시절은 오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청춘이라고 일컫는 시절에는 연애도 망쳤고 서른이 지나서는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 상대방은 늘 헌신짝처럼 행동했고, 나는 지독하게 이기적인 인간으로 남았다. 어느 노래 가삿말처럼 나보다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이 없다.
머릿속으로 오만가지 장면들이 스쳤으나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캠퍼스는 명화처럼 예쁘고 공간 하나하나를 놓치면 안 될 정도로 포토제닉 했다. 빈티지의 향연에 정신줄을 놓고 있다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고무나무로 된 문짝과 창틀로 장식된 복도에서는 한 교수의 강의가 들려왔고 그 수업을 듣지 않고 핸드폰을 만지작하는 포멀한 룩을 입은 여대생과 눈이 마주치면서 정신이 깨었다.
‘여기서 뭐 하고 있니?’ 하고 눈이 말했다.
철제문 대신 최소 몇 백 년은 된 나무로 만든 문이. 그리고 빨간 베스파도 나의 심장을 쿵쾅쿵쾅 뛰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