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된다는 것
기차경적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한때 사랑했던 것들에 대한 그리움과 후회가 동시에 몰려왔다. 나를 따라붙던 수식어들. 나만 알던 불안한 모습들. 모든 것이 타인에 의해 입은 독처럼 온몸에 퍼져 손을 쓸 수 없게 되어 병약하고 못된 나를 해독하라고 몰아세우는 것 같았다.
어김없이 알람이 울렸고 일어남과 동시에 피로가 밀려왔다. 대충 눈곱만 떼고 휴대폰, 지갑, 무선 충전기 같은 것만 가지고 약속시간에 맞춰 로비에 내렸다. 따뜻한 카푸치노와 크로와상을 베어 물고 또 다른 그를 만난 것이다. 어젯밤과는 달리 차가운 현실에 직면한 우리가 있었다.
"잘 잤어?"
"피곤하네."
다소 퀭한 눈빛과 바삭한 입술 그리고 푸석한 머릿결이 닮아 있다. 까무잡잡한 그와 함께 당일치기 기차 여행을 가는 날이다. 정확히는 직사각형 테이블에 앉은 대만인 셋과 깍두기처럼 낀 한국인끼리 나눈 대화에서 이번 여행을 결정했다.
"경혜, 내일 계획 있어?"
"음, 사실 베로나를 갈까 하는데.."
“베로나? 사람 많아서 네가 좋아하지 않을 거야."
"그래? 이유가 뭐야?"
"나 이미 갔다 왔어. 로미오와 줄리엣 촬영지잖아. 완전 유럽인들의 성지야."
단박에 이해되는 설명에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너의 계획은 무엇인데?"
"(환한 치아를 드러내며) 파도바!"
거부는 거절하는 투의 적극성에 져버렸다. 사실 나도 베네치아에 와서는 동행에 집착했다. 독백으로 가득한 여행에 조금은 신물이 났나 보다. 무엇보다 친구들이 끊임없는 관심을 준 것이 컸다. 언제부터 소극적으로 변했는지 모르지만 어릴 적 나를 일깨워주는 동무들을 만나 어느 때보다 신이 났다. 함께하지 않을 이유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스며들고 있었다.
“파도바도 알아봤는데 나쁘지 않더라.”
“맞아. 후회하지 않을 거야.”
“같이 갈까?”
쉬운 결정이었다. 생각을 깊게 했다면,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나를 입히기 위해 어쩌면 도전 아닌 도전을 위해 평소에 입지 않은 옷을 꺼내 입은 것이다.
햇살이 비치니 노골적인 상황이 분명해졌다. 고작 3시간 정도 수다 떨던 상대가 너무나 또렷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표정관리가 되지 않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남보다 자신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고 상대의 기분보다 자신의 기분에 중점을 두기 시작했다. 물론 대화에 귀 기울이고 솔직하게 생각하고 그대로 행동했다. 그때는 머리를 굴려 얘기했는데, 지금은 마음껏 상대가 되어 얘기한다. 그것이 순수와 맞닿은 관계랄까. 서로 거리낌 없이 조건을 달지 않고도 끝없는 얘기를 이어갈 수 있게 한다.
그렇게 혼자만큼이나 평온한 상태로 여행이 시작되었다.
“파도바행 기차표를 끊어야 해.”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정말? 매표소에 가야 할까?”
“아니, 지금 온라인으로 끊자!”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쾅! 하고 떨어진 것 같았다. 마치 급히 전달받지 않은 일을 처리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신입사원 같은 표정을 지었다. 어젯밤 파도바행 기차 시간표를 알아봤지만 변동이란 게 도사려서 의견을 조율하려고 했다. 오늘 그는 당장 5분 후 출발하는 기차표를 끊자고 제안한다. 단전에서부터 뜨거운 화가 올라오려 했지만 조용히 휴대폰을 켰다.
이미 기차표를 예약한 이력이 있는 그는 손쉽게 예약을 마쳤고 나는 휴대폰을 바라봤다. 재촉되는 상황 속에서 평정심을 찾아야 했다. 도무지 예약을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자 결국 다음 기차를 타기로 했고 그제야 여유가 생겼다. 첫 시작부터 기분이 오묘했지만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나의 가식은 약자에게만 통한다.
그때는 돈이 모자라다는 핑계로 무임승차를 했었다. 이탈리아 피렌체로 향하는 기차에 무임승차해서 2배가 넘는 벌금을 내보기도 했고 부산 지하철을 무임승차해 초등학생 당시 엄청난 벌금을 냈기 때문이다. 이제는 돈이라는 단순한 가치를 알기 때문에 비싼 명품도 필요도 없다는 것을 안다. 돈의 속성인 유동성을 생각해 보면, 돈을 쓰는 것보다 지니고 있는 것이 정신건강에 도움이 된다. 물질에서 멀어질수록 내 존재의 심연에서 멀어진다. 반복되는 깨우침에 기어오르는 무궁한 자만심은 피지도 못하고 자꾸만 꺾이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말했다.
“(당연하다는 듯) 그냥 무임승차해도 돼.”
”(다소 언짢은 표정으로) 무슨 소리야?”
한 살 많은 어린 그를 향해 살기를 띤 레이저를 쐈다. 이십대를 졸업한 나는 서른일곱 살인 그가 새삼 놀라웠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자기반성과 개선점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때부터였다. 나는 그와의 대화에 신물이 났고 여행에 집중할 수 없었다.
현지 가이드를 자초하는 ‘카우치 서핑’ 호스트를 부르자는 제안도 겨우 말렸고 준비 없이 나를 부른 것 또한 경멸스러웠다. 그 멸시에 가까운 눈초리를 나에게 돌렸다. 따지고 보면 내가 선택해서 온 당일치기 여행이라 남탓할 구실이 없다. 그렇게 꿀 먹은 벙어리처럼 시속 200km가 넘는 기차 안에서 창밖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