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바도르 클럽의 진수식 - 개인의 구원은 어떻게 세상의 구원이 되는가
구원자들은 언제나 이상하다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이상하다. 보들레르의 미학은 이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악의 꽃’, ‘파리의 우울’. 두 권의 책으로 보들레르는 현대 시의 지평을 열었다. 그는 왜 추하고 기묘한 것을 아름다운 것과 연결했을까? 그것도 언제나란 단어를 통해, 모든 시간대에서 아름다움과 이상함을 뗄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답은 단순하다. 보들레르 자신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그는 마약, 여자, 도박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영역에서 스캔들을 일으켰다. 확실히 정상은 아니다. 그가 시를 통해 세계관을 구성하고 그 안에서 자신을 긍정하지 않았더라면 그저 정신 나간 사람 중 하나로 그쳤을 것이다.
미학은 고차원적이며 원론적인 자기 긍정이다. 단순히 ‘나’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나’가 옳음에 포함되어 있는 시야를 제시하는 것이기에 고차원적이다. 또한 개인의 미에는 자신이 포함될 수밖에 없기에 원론적인 부분에서 세상을 건드린다. 이는 소통의 시작이다. 타자와 단절된 자폐적 세계를 구성하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세상을 구부려 세계의 일부로 자신을 편입시키는 것이다. 친숙함을 바탕으로 개인은 세계를 자기 쪽으로 끌고 오고 세상은 보다 넓어진다. 보들레르는 자신뿐 아니라 비슷한 구석에 위치한 이상했던 모든 이들을 아름다움에 포함시켰다. 대범하게 이루어지는 개인의 구원은 주위 사람들까지 구원한다.
이상(異常), 다를 이異에 항상 상常을 쓴다. 편안한 자연상태가 아닌 모든 상태. 보들레르는 아름다움을 작위적이지 않은 이상함으로 한정했다. 작위적이지 않다면 사실 이미 또 다른 편안한 상태이다. 공공연하게 보고 되지 않았거나 무시된 평상일 뿐이다. 이상을 긍정하는 순간, 아름다움은 개인의 것이 된다. 각자가 자신을 긍정하는 주체가 되어 티 나지 않게 세상의 끝자락을 구부리면-낮은 곡률의 벽면은 가까이에서 평면으로 보이듯이 말이다- 평상의 범위는 넓어진다.
젊은 놈들은 언제나 이상했고, 이상하고, 이상할 것이다. 충분히 지치지 않았기에 만족과 거리가 멀고, 늘 이 상태에서 저 상태로 이동한다. 삶을 살아갈 이유가 어딘가에 숨어져 있을 것이라 믿으면서. 이유가 없는 것에 이유를 댈 때 세상은 비틀어진다. 그 모순이, 모순에 따른 왜곡이 너무 뻔히 보이지 않을 만큼 다듬어지면 보편성을 띠게 된다. 충분히 넓게 구부러져 있어 다수를 에두를 수 있을 때 자기 긍정은, 자폐적인 성격에서 벗어나 미학, 또 하나의 세계관이 된다.
젊고 이상한 사람들을 한곳으로 모아 이야기를 나누는 이유는 세계를 긍정하기 위해서다. 젊은이들은 고정되어 있지 않기에 늘 변두리로 밀려난다. 세상의 끝자락은 비뚤다. 아마 끝끝내 정합한 형태로 그려지지 않을 테지만 살아남기 위해선 각자 서 있는 꼭짓점에서 맡은 세계의 끝을 구부려야 한다. 자신이 더 살 만한 곳으로, 또 테두리 밖으로 삐져나간 사람들까지도 포괄할 수 있는 곳으로. 그렇게 젊은이는 구원자가 된다. 살바도르 클럽은 보다 세상을 섹시하게-살고 싶게 만드는 세계의 끝이다.
필요 이상은 각기 다른 젊은이들이 무의미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만의 구원을 찾는 이야기다. 의존은 자립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보이지만, 이들은 존재하기 위해서-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위해서- 무엇에 의존한다. 개인과 세상은 이 집착과 중독으로 간신히 연결되어 있다. 이런 의존을 긍정하기 위해 22살에 필요 이상을 썼다. 지금은 단지, 이들의 의존이 파괴적이지 않고 소통으로 이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나 또한 개인으로서, 완성된 형태의 이야기를 제시하면서 또 이야기의 일부가 되면서 쥔 붙여 살 한 평의 공간을 만들어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