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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울 Dec 29. 2023

그는 무엇 때문에 싸우는가?

<노량: 죽음의 바다> 3부작의 위대한 결말

 

[명량과 한산의 정반합]

 김한민 감독의 이순신 3부작이 드디어 그 결말을 맞았다. <명량>에선 두려움과 용기를 주제로 한 내러티브가 두드러졌으나 신파를 비롯한 내러티브 과잉이 발목을 잡았다. <한산: 용의 출현>에선 CG와 고증을 비롯한 비주얼적 압도감이 빛을 발했으나, 내러티브의 부재 때문에 전작만큼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노량: 죽음의 바다>는 단언컨대 두 작품에서의 시행착오를 통해 빚어진 훌륭한 정반합의 작품이다.

 모든 영화는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은 스토리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명량에서는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한산에서는 ‘바다 위에 성을 쌓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던져졌다. 노량에서 던져진 질문은 좀더 본질적이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마지막까지 싸우는가?’

 [원한의 굴레를 끊다]

 작품의 초반부에선 이면(이순신의 3남)의 죽음이 누차 강조된다. 이순신의 꿈에서 이면은 일본군에게 참살당한다. 이순신은 이면에게 달려가지만, 그에게 죽은 일본군 병사들이 그를 가로막는다. 일본군에게서 아들을 빼앗긴 그 또한 누군가의 가족을 빼앗은 장본인이다. 복수는 복수를 낳고 누군가가 이를 멈추지 않는 이상 모두가 그 굴레에 갇히게 된다. 진린이 붙잡은 포로들이 실제로 이면을 죽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결국 이면을 죽인 것은 끊임없는 전쟁과 살육의 굴레이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아들의 죽음을 통해 일종의 각성을 한 셈이다.

 전투가 시작하기 전에도, 그리고 진행되는 중에도 그는 끊임없이 물음에 직면한다. 이에 대한 그의 대답은 일관적이다. 이렇게 적들을 보내주면 올바로 이 전쟁을 끝낼 수 없다는 것이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 그는 이제까지의 사망자 명부를 불태워 날려보내며 그들의 살아생전 모습을 떠올린다. 비명횡사하여 장례도 치르지 못했을 그들을 화장하는 모습은 위령제를 연상케 한다. 그렇다면 그는 죽어간 이들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전투에 임한 것인가? 이미 그가 현자로서 각성했기에 그 말은 맞지 않다. 그는 모든 원한과 분노, 슬픔을 불태워 날려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전작들과 달리 화공이 가해지는 것 또한 이 맥락에서 설명될지도 모른다. 이 불은 파괴의 불이 아닌, 정화의 불이다.

 [해전의 제 2막, 의지의 충돌]

 동이 트고, 바다 위에서 처절한 롱테이크 전투씬이 펼쳐진다. 난전 속 서로 죽고 죽이는 조선, 명, 일본 삼국의 병사들에서 이순신으로 이어지는 이 장면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전쟁으로 남는것은 오직 죽음뿐이다. 이순신 당신의 대의가 과연 삶을 이어나가는 것보다 값지다고 할 수 있는가?’ 이미 전의를 잃은 적들을 열도 끝까지라도 쫓아가 섬멸하는 것이, 부하들, 혹은 자신의 생명과도 바꿀 수 있을 정도로 값진 행위인가? 질문을 받고 고뇌하던 이순신 앞에 죽은 동료들과 아들의 환영이 나타나면서 이순신은 다시금 각오를 다지는 것이다.

 그는 북을 울리며 싸움을 독려한다. 이 북소리는 싸움을 독려하는 것임과 동시에, 죽은 사람들에게 바치는 진혼곡이기도 하다. 또한 이 자리에서 모든 굴레를 끝내버리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하다. 결국 그가 다진 결의는, 7년간의 전쟁 중 쌓이고 쌓인 응어리들을 이 전투에서 모두 불태워 날려버리겠다는 것이다.

 시마즈는 이 북소리를 들으며 고통스러워한다. 병사들과 함께 ‘마귀’들을 뚫고 돌아가고자 했던 그에게, 모든 굴레를 끝낸다는 것은 결국 관음포에 수장당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에겐 전쟁의 마무리보다 전쟁 이후가 중요했기에 이순신에 대척점에 서야 했다. 이순신이 선봉 함대를 ‘불태울’ 때, 그는 맞불 작전으로 불을 꺼버렸다. 이순신이 죽음을 각오할 때, 그는 탈영병들에게 ‘살아서 돌아가자’라고 독려했다. 고니시가 시마즈에 합류하지 못한 이유로는 그의 부하가 시마즈에게 처참히 죽어있는 꼴을 본 것도 있지만, 노량에서의 이순신의 각오에 압도당했다는 것도 있을 것이다.

[끝나지 않는 북소리]

 이순신이 죽고 나서도 북소리는 계속된다. 전투가 끝난 후의 북소리는, 이순신에 대한 애도, 그리고 한풀이이기도 하다. 영화에선 시마즈의 생사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이순신이 전쟁을 올바로 끝내기 위해 꼭 잡았어야 했던 시마즈가 살아돌아갔다면, 이 전쟁은 과연 올바로 끝난 것이 맞나? 이는 쿠키영상에서 전쟁이 끝나고도 빛나고 있는 대장별을 통해 암시된다. 광해는 대장별을 보고 이렇게 말한다. “전하지 못한 말이 있거나, 끝내지 못한 일이 있거나.” 과연 그 때의 전투는, 그리고 7년간의 전쟁은 올바로 끝났던 것일까?

 영화에선 ‘전쟁을 올바로 끝내는 것’이 무엇인지 끝까지 말해주지 않는다. 답을 내리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이토록 짙은 여운이 명량과 한산에서도 남았던가? 스토리텔링 역량과 비주얼이 정반합으로 합쳐졌으면서도 전쟁과 죽음에 대한 사유가 그려지는 이 영화는 상업적으로는 실패할지언정 작품으로서는 수작이라고는 할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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