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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택 Jan 30. 2024

공부 못하는 아들을 위해 미국에 정착한 엄마의 이야기

괜찮아! 내일은 더 나아질거야! 

  위챗에 게재된 중국인 엄마의 미국 이주 스토리에 공감이 커서 원문을 번역하여 소개합니다:


  미국에서 8년을 살고 2003년 귀국하여 일하다가 미국으로 다시 거주지를 옮긴 2019년까지 세상은 많이 변했다. 내 감정도 많이 변했다. 이제 며칠 후면 미국에 온 지 3년이다.

 

  Glen Cao의 소설 <뉴욕의 베이징 사람들>에는 "그를 미워하면 미국에 오게 하고, 그를 사랑하면 역시 미국에 오게 하라"는 말이 있다. 누군가에게 관심이 있으면 그를 미국에 오게 하라는 것이다. 


  1995년 중국을 떠날 때 월수입이 2,000위안 정도였다. 신문사가 그 절반을 주고 나머지 절반은 각종 매체에 보낸 기사 원고료와 기자회견, 그리고 영화 시사회에서 주는 홍빠오(금일봉, 교통비 등)였다. 미국에 가니 비싼 물가 때문에 채소 하나 려고 해도 가슴이 떨렸다. 당시 채소 값은 상하이의 100배가 넘었다.

 

  지난 30년의 개혁개방, 특히 90년대 이후 중국 일반 노동자의 소득은 꾸준히 상승하여 자연스럽게 물가 역시 올랐다. 2019년 새해 미국 땅을 다시 밟았을 때 갑자기 물가가 싸게 느껴졌다. 달걀, 우유는 말할 것도 없고 소고기, 과일 역시 가격을 보지도 않고 막 집어 담을 정도였다. 


  유학생이던 때와 크게 대비되었다. 당시에는 매월 한번 2시간 동안 차를 몰고 시카고에 가서 먹을 것을 샀는데 모두 싼 것만을 골라 샀던 기억이 있다. 학교 부근의 아시안 마켓에서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벌었는데 바로 눈앞의 물건에 침만 삼킬 뿐 한 번도 산 적은 없었다. 우리 세대의 힘들었던 유학생들과 비교해 보면, 지금 중국에서 유학을 온 아이들은 아르바이트해서 학비를 낸 것을 거의 본 적이 없다.

 

  아시안 마켓의 주인과 부인은 대만사람이다. 남편은 엔지니어링 박사고 그의 아내는 음악을 전공했다고 한다. 나는 당시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미국에 다시 갔을 때 많은 고학력의 화교들이 장사에 종사한다는 것을 알았다. 보험과 부동산, 그리고 마트, 식당, 인테리어 등 업종에 박사 사장이 드물지 않았다. 사회가 어떤 직업에 어떤 학력을 규정하지 않는 한 그들 모두는 자신의 선택을 따를 것이다.


  당시 나보다 나이 많은 친구 하나가 미국에 올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엘리트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사실, ‘80, ’90년대의 출국 열풍은 대학 캠퍼스의 한 풍경이었다. 좋은 학교일수록 해외 유학이 많았다. 좋은 학교의 학급은 2/3 이상이 유학을 가며 심지어 학급 전체가 유학을 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 사람들은 졸업 이후 대부분 미국의 일반 중산층이 되었으며, 지금은 기본적으로 자녀가 대학에 진학하거나 혹은 이미 대학을 졸업하여 Empty nest(빈둥지)* 단계로 접어들었다. 그들이 전혀 상실감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Empty nest(빈둥지): '가족생애주기(FLC, Family Life Cycle) 9단계(Wells & Gubar. 1966)'에 따르면, 자녀가 성장하여 출가한 이후 집에는 부부 2명만 남게 된다. 이 상황을 어린 새들이 떠나고 난 빈 둥지로 표현하여 Empty nest라고 한다. Empty nest 단계를 다시 둘로 구분한다. Empty nest Ⅰ은 '직업이 있는 경우'를 말한다. Empty nest Ⅱ는 '퇴직한 경우'를 말한다.


  미국에서 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상하이에서 막 이사 올 때의 그 기득권자의 교만은 서서히 소멸하였다. 비록 그들이 중국경제가 도약하던 수십 년 동안 고국을 떠나 있었지만 개인적 성장에 있어서는 조금도 낙후되지 않았다. 


  미국으로 다시 돌아온 이후, 20년 지기의 미국내 옛친구들이 일부 중국 국내의 투자 고수들처럼 벼락출세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일종의 세월의 안정감이 있으며, 그들의 얼굴에는 ‘포용’이라는 두 글자가 씌어있었다. 이 포용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궁색함이 아니라 삶의 굴곡을 겪은 일종의 깊은 이해에서 나온 것이다. 자연으로 돌아가 삶 속의 작은 것을 사랑하며, 비교하지 않고 걱정하지 않으며, 언젠가는 반드시 출세할 거라는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다. 


  중년이 된 그들은 달리기, 골프, 스키, 그리고 캠핑카로 미국 여행을 시작한다. 복잡한 인간관계를 벗어나서 안정된 중산층 삶을 영위하며, 그들은 금전 이외의 것을 추구하고 젊은 시절에 이룰 수 없었던 꿈들을 다시 일깨우기 시작했다. 


  놀란 것은, 자신의 미래에만 관심을 두던 당시의 상황과 비교하면, 지금 해외의 중국인들은 일부 관점이 서로 같지 않더라도 다른 의견을 포용하는 것을 배운다. 이것은 거대한 진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사회의 특징은 상대방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발언할 권리는 지켜주는 것이다. 이것은 지식층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변론의 목적이 이기고 지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생각이 충돌하면서 함께 나아가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독립적인 사고는 언제나 한 사회가 진보하는 기본이다. 


  미국에 처음 왔을 때는 8년 동안 대부분 시간을 학교에서 보냈다. 이번에는 아이를 데리고 왔기 때문에 미국의 기초교육을 경험하게 되었다. 미국의 초등학교, 특히 공립학교 선생에 대한 대우 수준이 높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이 직업을 택한 이유는 대부분 그 직업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어디에나 대충대충 하는 선생이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양쪽 지역을 다 경험한 학부모로서 보자면 천양지차다. 여기는 숨 막히는 연속적인 전화도 없다. 조금의 고려도 없이 상황을 고자질하지도 않는다. 아이가 급우와 충돌했을 때 양쪽 학부모를 대치하게 하지 않는다. 


  자녀가 학교에서 어떤 갈등을 일으켜도 그것은 아이의 일이다. 학부모와 엮어서 갈등을 확대하지 않는다. 자녀가 학교에서 어떤 아이와 어떤 갈등을 일으켰는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모른다. 교사가 학부모에게 다른 학생의 일을 말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묻는다. “상하이도 좋은데, 왜 이민 가나요?” 

  나는 공부 못하는 아들이 있고, 중국 선생의 눈에 그는 학급의 불안 요소다. 골방에 가두고, 손바닥을 때린 일들은 아이가 나중에 말해주었다. 벌을 서고, 교실에서 야단을 맞는 것은 다반사다.

 

  미국에 와서는, 아이가 중국에서 있었던 일들을 종종 이야기하면서 행여 잘못하지 않을까 또 행동을 자제하지 못할까 두려워한다. 선생은 아이를 자주 위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실수해도 괜찮아, 내일은 더 좋아질거야.” 


  3년 동안 선생이 가장 많이 말한 것은 아이가 어떻게 성공하느냐였다. 초등학생이 무슨 성공이 필요할까에 대해 좀 뜬금없었지만, 그러나 선생의 눈에는 설사 초등학생일지라도 성공의 기쁨을 체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줄곧 꾸짖어서 잘못을 바로 잡는다면 성공의 느낌을 체험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감정은 장차 아이의 삶에서 자신감을 빼앗게 된다.

 

  왜 미국 아이들 모습에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있는지 알게 되었다. 3년 동안 느낀 것은, 아이의 문제는 단지 그 부모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다. 사회 전체가 책임을 지고 아이가 건강하게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다. 엄마 혼자 싸우는 것이 아니다.      


美国留学那点事 2022-02-24 12:52

作者:Sunny 经授权转载

출처:渡十娘(ID:dushiniang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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