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동날개로 맺은 충칭 인연
충칭과 나의 인연은 색다르다. 그 인연은 색동날개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색동날개는 나에게 첫 직장이자 그 구성원이라는 공적의 건조한 관계 이상의 각별함과 고마움이 있다. 이 각별함과 고마움은 2000년 4월 25일 색동날개의 충칭지점장으로 부임할 때 잉태됐다.
나는 부임 후 두 달이 채 되지 않은 6월 22일 충칭-서울 국제선 직항로를 개설하고 색동날개의 첫 여객기를 성공적으로 론칭했다. 사적으로는 40대에 들어선 노총각 지점장이 충칭에서 현지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아들을 낳아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다. 색동날개의 인연으로 나는 충칭의 사위가 되었다.
색동날개의 서울-충칭 노선 취항은 사장이 직접 결정했다. 그는 충칭이 사천성에서 분리되어 충칭직할시로 승격된 1997년 이후 충칭을 찾았다. 그는 충칭시의 인구가 3,300만 명이라는 것에 놀랐고, 또 시 중심에 위치한 고급 백화점의 신사복 가격에 놀랐다.
그는 이태리 브랜드 매장에 들어가 마음에 드는 양복을 하나 골라 가격표를 보았다. 20,000 CNY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당시 환율이 135원 정도였으니 그가 고른 양복은 270만 원이다. 옆에 몇몇 양복을 보아도 대부분 가격이 200만 원을 넘었으니 놀랍다.
그는 남산3호 터널 입구 쪽에 자리한 신세계 백화점의 고급 신사복 매장의 기성복을 평소 즐겨 입었다. 1990년대 중반 신세계 매장에서 판매하는 최고급 양복의 가격이 150~200만 원 정도였으니 충칭 백화점의 양복 가격에 놀랄만하다. 아무리 중국 4대 직할시 중의 하나라고 하지만 중국 서부의 깊숙한 곳에 위치한 도시의 양복 값이 한국 유명 백화점보다 비쌀줄이야. 그는 비싼 양복이 잘 팔리는지 궁금했다.
"여기 적힌 게 판매 가격인가요?"
멋진 제복의 늘씬한 매장 복무원에게 물었다.
"네, 가격표의 가격 그대로 입니다."
가까이 다가와서 대답하는 그 복무원은 눈이 크고 코가 오똑하여 누가 보아도 충칭의 전형적인 미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 양복들이 잘 팔리나요?"
색동날개 사장은 충칭 소비자의 구매력이 궁금했다.
"네, 아주 잘 팔립니다."
피부가 하얀 복무원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을 이어간다.
"주말에는 충칭시 외곽의 현에서 올라와 몇 벌씩 사가기도 합니다."
충칭 외곽의 현급 도시들에 거주하는 신흥 부자들이 주말마다 충칭에 놀러와 돈자랑을 하고 간다고 말한다.
충칭시가 직할시로 승격이 되고 중국 정부가 충칭을 서부대개발의 전략적 중심 도시로 개발하면서 그 와중에 신흥 부자들이 생겨났다.
색동날개 사장은 3,300만의 인구와 그리고 백화점에서 200만 원이 넘는 양복이 잘 팔릴 정도의 잠재 구매력을 높이 평가하고 충칭을 취항 목적지로 결정했다. 색동날개는 2000년 6월 22일 충칭-서울 노선에 국제선 항공편을 취항했다.
당시 영업부문 임원은 이러한 사장의 결정에 그다지 호응하지 않았다. 그들은 1988년 색동날개의 창립 초기에 태극항공을 등지고 이동해온 사람들이었다. 사장은 충칭 취항을 결정하고 이들에게 철저한 취항 준비를 지시했으나 이들은 취항일이 다가와도 충칭지점장 인선조차 하지 않아 사장으로부터 불호령이 떨어졌다.
2000년 4월 중순 색동날개의 중국지역본부장은 장춘지점장인 나에게 전화를 했다.
"곧 충칭지점장으로 발령낼 것이니 창춘에서 가능한 빨리 짐을 싸서 충칭으로 가도록 해라."
자초지종 설명도 없이 명령부터 하달했다.
"본부장님, 여기 할 일이 많습니다. 괜찮다면 여기에서 임기를 마무리 하겠습니다."
과장 직급의 지점장이 임원의 명령을 일언지하에 거절했으니 그는 당황했을 것이다.
"할 일이 뭔데?"
그는 당황했는지 목소리가 높아졌다.
"9월에 창춘국제도서박람회가 열립니다. 대형 국제 행사에 저희 지점이 참여합니다. 이것 말고도 벌려놓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9월에 열리는 창춘 국제행사에는 색동날개가 행사 개막식 무대 위의 귀빈석 10개 중 2석에 앉기로 되어 있었다. 나는 중국지역본부장과 함께 앉을 요량이었다.
"이것 봐, 그것은 너가 아니어도 후임 지점장이 와서 하면 돼!"
그 일은 누가 해도 되는 것이니 너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다. 내가 아니면 남들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여기며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터라 그런 소리를 들으니 별로 기분이 좋질 않았다.
"그래도 제가 시작했으니 제가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왜 제가 꼭 충칭엘 가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나는 한번 더 거절 의사를 밝히며 내가 가야 하는 이유를 물었다. 회사 내부에 충칭지점장으로 가고 싶어하는 직원들도 많은데 굳이 나를 보내려는 이유가 궁금했다.
"취항일까지 시간이 별로 없다. 지금 당장 가방 하나 들고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 잔말 말고 갈 준비해!"
중국지역본부장 역시 단호한 어조로 재촉했다.
나는 당시 노총각이었다. 딸린 가족이 없으니 가방 하나 들면 어디든지 갈 수 있는 고도의 기동력을 확보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그렇지. 웬 마른 하늘에 날벼락인가?
본부장은 처음에는 살살 달래는 어조로 이야기 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수가 틀렸던지 협박조로 급선회했다.
"좋은 말로 할 때 충칭으로 갈래? 집으로 갈래?"
나는 충칭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2000년 4월 25일.
나는 샘소나이트 007 하드 케이스 하나 들고 이슬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충칭장베이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그로부터 58일이 지난 2000년 6월 22일 나는 충칭-서울 노선에 최초의 국제선 항공편을 성공적으로 취항시켰다.
그로부터 24년이 흘렀다. 세월이 흘러 많은 것이 변했다. 나는 회사에서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스스로 퇴사한 지 7년이 되었다.
2020년부터 코로나 3년이 있었고 그 사이에 관광학 박사 학위도 땄다. 항공과 관광을 주제로 박사 학위 논문도 냈고 또 Big2의 합병을 주제로 한 책도 출간했다.
2004년 충칭에서 낳은 아들은 코로나 시기에 KIS를 졸업하고 뉴욕으로 대학을 갔다. 나는 아들의 출생을 축하하며 색동날개 사장이 보내준 축하 이메일을 20년이 지난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나는 2024년 8월 30일 CA440편을 타고 충칭을 향했다. 8월 30일부터 9월 2일까지 유덕화의 충칭 공연이 있었다. 공연 행사 주관 기관인 충칭연출공사 사장의 초청을 받고 8월 30일 충칭을 방문했다. 나는 충칭과의 인연으로 충칭과 한국 간의 아이돌 공연과 뮤지컬 공연 등 무대 예술의 교류 협력을 모색하고 있다. 사드로 인한 한한령이 해제되고 교류 협력의 물꼬가 트일 시점을 기대하고 있다.
나는 8, 90년대 한국을 강타한 홍콩 르누아르 영화의 대표 스타 중 하나인 유덕화의 충칭 공연을 기회로 활용하여 엔터테인먼트 업체와 그리고 뮤지컬 공연 업체를 충칭에 초청하여 훗날의 기회를 도모했다. 나는 이를 충칭연출공사에 제안했고 공사는 흔쾌히 수용했다. 이들은 홍콩 슈퍼스타의 공연을 관람하는 것 이외에도 공사와의 회의를 통해 향후 협력의 기반을 놓았다.
나는 충칭과의 인연을 기반으로 충칭-한국 간 문화와 예술 및 교육 교류가 꽃 피우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