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순례 Mar 18. 2024

정초

그렇게 다짐을 했건만, 생각과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못함에 전화기를 잡고 망설인다.

보일러공의 말에 의하면 기름통을 흔들며 

“없어요.” 

황당했다. 남은 표시가 아직도 상당한데 믿어지지가 않았다. 대롱에 표시가 나를 속인 건지 내가 몰랐던지 찬바람이 볼을 스치고 지나간다. 벽에 부착되어 있는 보일러 운전 표시에 01과 E 표시로 빨간불이 깜빡깜빡하면 기름이 없어서도, 불이 붙지 않아서도 그럴 수 있다 하여 와 보십소 의뢰했었다.


미안해서 어쩐 담. 다시 전화를 걸었다. 

“미안해요 삼촌(편의상 부르는 호칭). 기름 표시가 많이 남아있어 보일러 수리기사를 불러보니 기름이 없다네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오겠단다. 잘 살펴보지 않고 신중히 생각하지 않은 티가 났다. 정초부터 이게 웬 실수람. 아침 일곱 시에 전화해서 기름 가져오라 해 놓고 다시 취소하고…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목소리로 받지 않았던가. 신속하게 올 요량으로 세수는 고사하고 밥은 먹었겠나 싶은 게 한없이 미안해졌다. 다시 전화를 할 때에는 재촉하는 전화로 알고

“예, 지금 출발해요.”

 하는 찰 라에 취소를 했으니 풍선 공기 빠지듯 내려앉는 심정이었을게다. 한데 전혀 그런 기색이 없다. 여전히 웃는 낯곧으로 기름을 주입하러 왔다.

내심 면목이 구차하여 입맛 다실 것을 내어주려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아침도 안 먹었지!”
“밥이 뭐여요 세수도 못하고 나왔구먼. 막 가려는데 오지 마라 또 와라 하여 막 달려왔구먼." 

하면서 웃는다. 참 속도 좋다 싶어

“짜증 났지! 아침부터 그것도 정초부터.”
“하이고 이깟 일로 엄니 또 신경 썼구먼? 이거 하려면 쓸개 간 창시 다 빼놓고 해야 돼요. 한밤중에도 전화하는 사람이 있는데 뭐!” 

하며 웃어넘긴다.

단골이 좋은 게 기름만 넣고 가는 것이 아니다. 보일러 점검도 살뜰히 봐준다. 고마워서 올 때마다 식사비 조로 따로 챙겨준다. 서로 간의 신뢰다. 오늘도 에어 빼주고 세심하게 살펴준다. 고맙기가 그지없다. 성격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 하기야 성격이 좋지 않으면 질 내 할 수도 없겠다 싶다. 새해에도 그저 사고 없이 건강하게 잘 살기를 기원한다. 추운 겨울에 기름 배달 가스배달 음식 배달 택배기사들이 보면 안쓰럽다. 주택가 진입로에 차가 버티고 있는 날엔 곤혹스럽게 배달을 해야 하는 어려움을 목격할 때가 종종 있다. 내 가족이 저런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 협조하는 마음이 동원돼야 할 것이다.


진심은 진정한 이웃이 되어 서로 웃을 수가 있다. 서비스로 갑 티슈를 건네는 손길에 만복이 깃들기를 마음속으로 기원하며 멀어져 가는 기름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새해 정초 미끄러질 뻔한 마음을 간신히 만회했다. 기사 삼촌의 또 다른 말이 스치고 지나간다. 올 때마다 보일러 점검을 잘해주어 보일러에 관한 일도 해주기를 바라니

“엄니, 보일러공들 어려워요. 그 사람들도 먹고살아야지 유우.” 

하는데 생각한답시고 말했다가 오히려 주책없이 되어버려 기사 삼촌이 어른 같았다.

“아유, 생각도 깊기도 하지.” 

어깨를 토닥이며

“이러니 내가 이뻐 하제.”
“어어! 엄니도 차 암 지 말이 맞잔 유우.”
"맞아 맞아 삼촌 말이 맞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단골 보일러공이 생각난다. 그 기사도 이 기사 삼촌처럼 좋게 잘 지냈다.

한 겨울에 보일러가 한밤중에 터졌다. 급한 나머지 인근 주유소로 전화를 했다. 거기서 그 기사를 보내 주면서부터였다. 물론 그 주유소에서 기름을 의뢰했던 점도 있겠으나 한밤중에 전화받아주는 주유소도 감사하거니와 한밤중에 대면도 없는 집에 방문하여 수리해 준다는 게 쉽지 않은데 직업정신이 투철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거였다. 그때부터 인연이 되어 단골이었는데 세월 앞에서는 이기지를 못하였다. 나이 들고 몸이 시나브로 쇠약해지더니 결국은 일손을 놓고 말았다.


오늘 왔다간 보일러 기사와도 새롭게 단골이 될 것 같다. 이 분도 친절히 보고 가셨기에 다음에도 잘 봐주실 것 같다는 생각에 인연은 그렇게 돌고 도는구나 싶었다. 기름 배달 기사 삼촌과의 인연도 언제 까질지는 몰라도 거래하는 동안에는 잘 지내볼 생각이다. 새해 아침 많은 생각들이 오고 간 시간이었다.




웃으면 봄

지은이: 양순례


살색 먹어치우는

보드라운 볼터치에

아가색이 귀여워

더 더 더 화사하다


곱디고운 매혹에

깔깔깔 유혹 심하다

눈 흘기는 실바람 예쁘기만 하다


봄날

만지기도 아까워 눈 맞추고 웃는다


거미 달 집어 먹다

카레 춤춘다


웃으면 봄

작가의 이전글 졸음쉼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