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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작별하지 않는다-한강/문학동네

과거를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

by 날마다꿈샘


오늘의 책 소개


한강 작의 장편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는 23년 11월 프랑스 메디치 외국문학상과 24년 3월에는 에밀 기메 아시아문학상을 연달아 수상했다. 그만큼 이 작품이 프랑스 현지에서 큰 공감과 지지를 얻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에밀 기메 아시아문학상 심사위원단은 이 작품을 '우정에 대한 찬가이자 상상력에 대한 찬가이며, 무엇보다도 망각에 대한 강력한 고발이다. 이 아름다운 페이지는 소설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니며 수십 년 동안 묻혀 있던 충격적인 기억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 메디치상

실험적인 작품에 주어지는 젊은 문학상이다. 공쿠르상, 르노도상, 페미나상과 함께 프랑스 4대 문학상으로 꼽힌다.


* 에밀 기메 아시아문학상

프랑스 파리에 있는 기메박물관(국립동양미술관)에서 프랑스 내 아시아문학을 활성화하고자 2017년에 제정한 상이다.



2021년 출간 당시 인터뷰에서 한강 작가는 "제주에 월세방을 얻어 서너 달 정도 지낸 적이 있었는데, 주인집 할머니가 골목의 어느 담 앞에서 '이 담이 4.3 때 사람들이 총에 맞아 죽었던 곳'이라고 말씀하셨다며 그날의 기억이 소설이 되었다"고 회고했다.



5.18을 소재로 한 <소년이 온다>와 더불어 제주도 4.3사건을 배경으로 한 <작별하지 않는다>는 잊혀지지 않는 현대사의 질곡을 다뤘다는 점에서 그 궤를 같이 한다. 그래서 읽는 내내 <소년이 온다>와 비교하며 읽게 되었다.



이 책에는 4.3사건만 다루지 않는다.

6.25와 4.19를 언급하고 그때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유해를 수습했던 과정과 유족들의 모습을 200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오며 보여준다.



솔직히 소설을 한 번 읽고는 이해하기 쉽지 않아 전문가들의 해석과 서평, 독서후기 등을 많이 참고했다. 코멘터리 e북과 독서 모임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줄거리


소설가 경하는 2014년 여름, 이상한 꿈 하나를 꾼다. 성근 눈이 내리던 날 벌판의 봉분 사이를 걷다가 바다의 밀물이 무릎까지 차올랐다. 시간이 없었다. 이미 물에 잠긴 무덤들은 어쩔 수 없더라도 위쪽에 묻힌 뼈들을 옮겨야 했다. 어쩔 줄 몰라하는 사이 그 물을 가르며 달리다 눈을 떴다.(이 꿈 이야기는 작가가 이 책을 쓴 의도를 충분히 보여준다)



경하는 5.18 광주의 이야기로 추정되는 이야기를 책으로 쓴 뒤 온몸의 통증을 느끼고 심지어 죽음을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 경하는 그 꿈과 연관된 작업을 같이 하기로 했던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인선의 갑작스러운 부탁을 받고 그녀가 입원해있는 병원으로 향한다.(인선은 목공 작업을 하다 손가락 두 개를 전기톱에 잘리는 부상을 당했다)



인선의 부탁은 당장 제주도에 있는 자기 집에 가서 혼자 남겨진 앵무새 아마가 살아있는지 살펴달라는 거였다. 눈을 헤치고 겨우 집을 찾아갔지만 아마는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었다.



인선은 분명 서울 병원에 누워있고 앵무새 아마는 천으로 싸서 알루미늄 박스에 넣어 나무 밑에 묻어줬는데 둘 다 실제처럼 경하 눈앞에 나타난다.



인선은 책장 깊숙이 있던 4.3 사건에 관한 기록물을 경하에게 보여주며 자신의 가족, 특히 어머니와 아버지가 직접 목도한 당시의 경험과 유족들의 파란만장한 삶을 이야기한다.



등장인물

1. 경하

이 소설 속 주인공 경하는 소설가이다. 소설의 서두는 경하의 꿈 이야기로 시작되는데 실제로 한강 작가도 꿈을 꾸게 되어 이 작품을 구상하게 되었다. 경하는 한강 작가 자신의 아바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여러모로 작가와 닮아 있다. 그래서 소설 초반 책을 읽을 때 경하가 과연 허구의 인물일까 의구심이 들었다.



2. 인선

인선의 직업은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이다. 그녀는 베트남 전쟁, 일본의 군국주의 침략, 제주와 오키나와 학살 등 국가가 저질렀던 모든 만행들이 주 관심사이다. 그녀가 만들었던 단편 영화 중 처음 호평받은 것은 베트남의 밀림 속 마을들을 헤매며 한국군 성폭력 생존자들을 인터뷰한 기록이었다.


이 대목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작가는 인선의 시선을 빌려 이런 일련의 일들은 과거의 것으로만 머물지 않고 현재와 이어져있음을 상기시키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3. 정심

한강 작가는 이 소설을 쓰는 동안 정심의 마음을 매 순간 들여다보았고, 그 사랑과 함께 살았다고 했다. 그만큼 4.3 사건을 직접 목도하고 경험했던 정심은 이 소설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핵심 인물이다.


눈 오는 날 언니와 심부름을 다녀온 사이 가족 및 마을 사람들이 모두 학살되었고 시체 사이에서 자신의 부모님을 찾아냈다. 정심의 오빠는 교도소에 수감됐는데 이감된 뒤 수십 년간 행방이 묘연했고, 그런 오빠를 찾기 위해 관절염으로 고생하는 노년까지도,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도 오빠 찾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책 읽고 각인된 키워드들


1) 제주도 4.3사건

1947년 3월부터 1954년 9월까지 7년 7개월에 걸쳐 제주도에서 좌익세력과 경찰 및 우익단체 간의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1948년 4월 3일, 미군 철수와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좌익세력과 군정 경찰과 서북청년회 등의 극우단체의 횡포에 반감이 쌓인 제주도민들이 봉기하게 되자 미 군정청이 경찰과 우익단체를 동원하여 강력하게 탄압한다. 이 과정에서 민간인 3만 명이 희생되었다.



2) 눈

<작별하지 않는다>는 본래 '눈 3부작'의 마지막 작품으로 구상되었다가 소설이 길어지며 한 권의 책으로 완성되었다. 그래서 이 작품 전체를 감싸안는 눈의 이미지는 강렬하다.


작가는 생명과 죽음 사이에, 빛과 어둠 사이에, 영원처럼 느리게, 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신의 공백 위로, 인간의 유한성을 환기시키면서, 눈을 무엇으로 규정하기보다는 그렇게 눈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작가는 책에서 눈을 이렇게 표현한다. 너무 아름다운 표현이라 여러 번 소리 내어 읽어보았다.


눈은 거의 언제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 속력 때문일까. 아름다움 때문일까? 영원처럼 느린 속력으로 눈송이들이 허공에서 떨어질 때,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이 갑자기 뚜렷하게 구별된다.(44~45p)



젖은 아스팔트 위로 눈이 내려앉을 때마다 그것들은 잠시 망설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그래야지......라고 습관적으로 대화를 맺는 사람의 탄식하는 말투처럼, 끝이 가까워질수록 정적을 닮아가는 음악의 종지부처럼, 누군가의 어깨에 얹으려다 말고 조심스럽게 내려뜨리는 손끝처럼 눈송이들은 검게 젖은 아스팔트 위로 내려앉았다가 이내 흔적 없이 사라진다.(89p)



물은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고 순환하지 않나. 그렇다면 인선이 맞으며 자란 눈송이가 지금 내 얼굴에 떨어지는 눈송이가 아니란 법이 없다. 인선의 어머니가 보았다던 학교 운동장의 사람들이 이어 떠올라 나는 무릎을 안고 있던 팔을 푼다. 무딘 콧날과 눈꺼풀에 쌓인 눈을 닦아낸다. 그들의 얼굴에 쌓였던 눈과 지금 내 손에 묻은 눈이 같은 것이 아니란 법이 없다.(133p)



이상한 열정에 사로잡혀 나는 눈 한 줌을 움켜쥐었다가 펼쳤다. 손바닥 위에 놓인 눈이 새털처럼 가벼웠다. 손바닥이 연한 분홍빛으로 부푸는 동안, 내 열기를 빨아들인 눈이 세상에서 가장 연한 얼음이 되었다. 잊지 않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 부드러움을 잊지 않겠다. (186p)



눈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참 섬세하고 아름답다.



2부 '밤-작별하지 않는다'에서 작가는 눈을 '온다, 떨어진다, 날린다, 흩뿌린다, 내린다, 퍼붓는다, 몰아친다, 쌓인다, 덮는다, 모두 지운다'로 표현하고 있다.



한강 소설을 읽기 전에는 눈은 단순한 한 두개의 이미지로만 비쳤다. 하지만 이제는 눈을 보면 한강이 떠오르고 많은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제주에서 눈을 맞으면 어떤 느낌일까? 자연스럽게 4.3사건이 떠오르지 않을까?



3)새

'새'는 작고 연약해서 지켜줘야 할 소중한 존재를 의미하는 것 같다. 4.3사건의 면면을 살펴보니 그때 당시 갓난쟁이를 포함해 나이를 막론하고 섬 인구 십분의 일인 민간인 삼만 명이 학살됐다고 한다.


인선이 키우던 앵무새 '아마'는 지켜야 했으나 지키지 못한 존재 당시 무참히 죽어간 아이들을 상징하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인선의 부탁을 받은 경하는 정성을 다하고 마음을 다해 죽은 아마를 묻어준다.



4) 작별하지 않는다

작가는 '어떤 것도 끝까지 작별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라고 한다. '작별하지 않는 것'은 이별을 고하지 않고 이별을 행하지 않는다는 두 가지 뜻이 중첩되어 있다.


작가의 설명을 들으며 제목을 떠올려보는데 처음에는 선뜻 이해가 안 됐다. 하지만 작품을 천천히 다시 읽어보며 그 의미하는 바를 곱씹어 보니 인선의 어머니가 치매에 걸린 그 순간까지 오빠를 찾았던 것은 피붙이와 작별하지 않겠다는, 작별하고 싶지 않다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결국 정심은 오빠와 작별하지 않은 상태로 생을 마감했다.


또한 '작별하지 않는다'의 의미는 과거의 상처와 아픔과 작별을 고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며 끝까지 끌어안고 가겠다는 작가의 의지의 표현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5) 사랑


내 기척에 엄마가 돌아보고는

가만히 웃으며 내 뺨을 손바닥으로 쓸었어.

뒷머리도, 등도 이어서 쓰다듬었어.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그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 작별하지 않는다, 311p -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안 됐을 때 인선의 엄마는 인선에게 물 구경을 가자고 했다. 그때 엄마가 인선을 쓰다듬었을 때 사랑이라는 걸 느꼈다.


학살 이후 실종된 오빠를 찾기 위해 장소를 넘나들고 시대를 거슬러 포기하지 않았던 엄마.

대구형무소에서 15년 동안 수감됐다가 형기를 마치고 나온 전과자이자 고문으로 얻은 수전증이 있는 남자를 남편으로 맞이한 엄마. 엄마는 어쩌면 그런 남편한테서 오빠의 모습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그 세월을 사는 동안 엄마에게서 보여진 것은 가족을 향한 지극한 사랑이었다.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엄마의 모습은 사랑 이외에는 다른 말로 표현할 방법이 없을 것 같다.




6) 기시감

한강 소설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분명 다른 내용인데도 소설 속의 분위기와 인물들이 묘하게 닮아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기시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총에 맞고, 몽둥이에 맞고, 칼에 베여 죽은 사람들, 목숨이 끊어질 정도로 몸 어딘가가 뚫리고 잘려나간 시체를 묘사한 부분에서는 <소년이 온다>의 한 장면이 떠오르고, 눈을 묘사하는 대목은 <희랍어 시간> <흰> <바람이 분다, 가라> 등의 문장들과 겹쳐 보인다.

<검은 사슴> <노랑무늬영원> <흰 꽃> <내 여자의 열매> 등의 소설과도 연결 지점이 있다고 한다.




7) 아름다운 제주 방언

요즘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보며 아름답고 독특한 제주 방언에 푹 빠져있는데 이 책의 공간적 배경이 제주도라 읽다 보면 심심찮게 정겨운 제주도 방언을 만날 수 있다.

많은 방언 중에 '속속허라'는 말이 가장 마음에 와닿는다.

그 말 자체도 예쁘지만 작중 인물의 심리와 상황을 그대로 녹여낸 말이라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1. 속솜허라 : 숨을 죽여라, 아무 소리도 내지 말아라

2. 곱닥하던지 : 곱던지

3. 몬딱 : 몽땅

4. 무사 : 왜, 무슨 이유 때문에

5. 곱곱하다 : 갑갑하다

6. 오목가심 : 명치

7. 거념하다 : 챙기다, 돌보다

8. 데끼다 : 던지다

9. 바당 : 바다

10. 모살왓 : 모래밭

11. 그추룩 : 그렇게

12. 하영 : 많이




기억에 남는 문장


- 어떤 사람들은 떠날 때 자신이 가진 가장 예리한 칼을 꺼내든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가까웠기에 정확히 알고 있는, 상대의 가장 연한 부분을 베기 위해.(17p)


- 반쯤 넘어진 사람처럼 살고 싶지 않아. 당신처럼. 살고 싶어서 너를 떠나는 거야. 사는 것같이 살고 싶어서.(17p)


- 자신의 삶을 스스로 바꿔나가는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쉽게 생각해 내기 어려운 선택들을 척척 저지르고는 최선을 다해 그 결과를 책임지는 이들. 그래서 나중에는 어떤 행로를 밟아간다 해도 더 이상 주변에서 놀라게 되지 않는 사람들.(33p)


- 눈처럼 가볍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눈에도 무게가 있다. 이 물방울처럼. 새처럼 가볍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그것들에게도 무게가 있다.(109p)


- 무엇을 생각하면 견딜 수 있나. 가슴에 활활 일어나는 불이 없다면. 기어이 돌아가 껴안을 네가 없다면.(134p)



한줄평


"이제 그만 작별하고 싶은데 결코 작별하지 못할 것 같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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