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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흰-한강/문학동네

이 책을 읽으면 하얗게 웃는 나를 마주하게 된다

by 날마다꿈샘 Mar 26. 2025


<흰>

한강 소설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계절은 겨울이다. 그리고 그 한복판에 '눈'이라는 소재가 단짝 친구처럼 늘 함께한다.

이 책에서도 역시 '눈'은 눈송이들, 진눈깨비, 눈보라, 흩날린다 등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었다.





출생 2시간 만에 언니가 죽고, 그 이후 태어난 오빠도 연달아 죽고 자신과 동생이 태어났다.

이 책은 얼굴도 모르는 언니를 잊지 못하는 주인공이 흰색을 연상시키는 다양한 사물들을 통해 죽음과 상실, 복잡한 감정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소설 같다기보다는 오히려 에세이나 시로 느껴졌다. 65개의 소제목 아래 작가의 소회들이 펼쳐지는데 그 글들은 서로 유기적이긴 하나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의 독립된 단편 에세이 같다. 보통의 소설처럼 줄거리가 확연히 읽히지 않아 더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흰 것'에 대해 쓰겠다고 결심한 후 한강이 처음 한 일은 목록을 만드는 것이었다고 한다. 한 단어씩 적어갈 때마다 이상하게 마음이 흔들렸단다. 작가가 적은 그 단어를 접할 때마다 내 마음도 덩달아 흔들렸다. 

그녀는 이 책을 꼭 완성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또한 이것을 쓰는 과정이 무엇인가를 변화시켜 줄 것 같다고 느꼈다.



쓰기로 마음먹은 순간뿐만 아니라, 글을 써나가고 완성하는 그 일련의 과정들은 작가에게 많은 변화를 준다. 마찬가지로 작가가 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큰 파동을 일으킨다. 내가 한강 소설을 읽으며 수많은 감정의 소용돌이를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한강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영롱하고 감각적인 단어들의 향연에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도 작가 특유의 문장 표현에 탄복하고 그걸 사유하는 작가의 시선에 일종의 경외감마저 느끼게 되었다.



특히 '하얗게 웃는다'는 표현은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었기에 다소 생소했지만 한강 소설을 읽다 보니 금방 납득이 되었고 이제는 어떤 상황에서 그런 표현을 쓰면 적절할지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되었다.



< 하얗게 웃는다 >


하얗게 웃는다.라는 표현은

(아마) 그녀의 모국어에만 있다.

아득하게, 쓸쓸하게,

부서지기 쉬운 깨끗함으로

웃는 얼굴, 또는 그런 웃음


너는 하얗게 웃었지.

가령 이렇게 쓰면

너는 조용히 견디며 웃으려

애썼던 어떤 사람이다.


그는 하얗게 웃었어.

이렇게 쓰면 (아마)

그는 자신 안의 무언가와

결별하여 애쓰는 어떤 사람이다.

-한강, <흰>-



이 책을 읽었을 땐 하루 종일 함박눈과 진눈깨비가 섞인 날씨라 이 부분을 읽으니 눈깨비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작가의 통찰력에 여러 번 곱씹어 읽게 되었다.




< 진눈깨비 >


삶은 누구에게도

특별히 호의적이지 않다.

그 사실을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이마를, 눈썹을, 뺨을 물큰하게

적시는 진눈깨비.


모든 것은 지나간다.

그 사실을 기억하며 걸을 때,

안간힘을 다해 움켜쥐어온

모든 것이 사라지리란 걸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비도 아니고 눈도 아닌 것.

얼음도 아니고 물도 아닌 것.

눈을 감아도 떠도,

걸음을 멈춰도 더 빨리해도

눈썹을 적시는,

물큰하게 이마를 적시는 진눈깨비.


*물큰하다 : 갑자기 심하게 풍기는 느낌이 있다.

(이 책을 읽고 건져올린 예쁜 단어)


-한강, <흰> -




'작별' 이 부분은 한강 작가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의 연장선처럼 느껴졌다.




< 작별 >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


말을 모르던 당신이

검은 눈을 뜨고 들은 말을

내가 입술을 열어 중얼거린다.

백지에 힘껏 눌러쓴다.

그것만이 최선의

작별의 말이라고 믿는다.

죽지 말아요. 살아가요.

- 한강, <흰> -




한강은 '흰 것'에 관한 사물들을 적고 그 목록들을 읽으며 '이 단어들을 들여다보는 일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단어들로 심장을 문지르면 어떤 문장들이건 흘러나올 것이다' '그 문장들 사이에 흰 거즈를 덮고 숨어도 괜찮은 걸까' 이런 질문들을 던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흰>은 한강이 단어들로 심장을 문질러서 탄생된 소설이겠구나라는 생각이 미치자 일말의 의심도 없이 바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치열한 과정이 있었기에 이렇게 독특하고 아름다운 소설이 탄생되지 않았을까.



비록 소설 전체가 확연히 내 마음에 와닿지는 않았지만 이 소설을 읽음으로써 '눈'에 대한 시각을 달리하고 아름다운 시어들과 문장들을 만났다는 사실만으로도 나에겐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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