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그해 겨울 세상이 눈으로 덮인 날

엄마를 보냈다.

by 빛해랑

흰 눈이 무릎까지 빠지던 날 엄마를 보내야 했다. 애틋하게 지내본 적도 없는데 말이다.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해 겨울을 잊지 못한다. 엄마는 자식 여섯을 타지로 보내고 시골집에서 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었다. 북적이던 식구가 그렇게 하나둘씩 자신의 인생을 찾아가는 것이 세상 이치인 듯 담담했고 늘 잘살라고만 했다. 할 말이 그것밖에 없는 것처럼. 자식 걱정에서 해방되었다고 생각했으나 결혼을 한 자식조차도 여전히 걱정거리를 안겨 주었다. 둘째 언니가 결혼 8년 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아 늘 엄마의 애간장을 타게 했다. 애기가 잘생기게 하는 약이라면 민간요법에서부터 온갖 약재를 구해다 먹였다. 시댁에서의 흠 잡히는 것이 당신의 잘못인양 전전긍긍 했다. 그것이 왜 엄마의 잘못이고 언니의 잘못인가 말이다. 엄마의 정성에 하늘이 응답을 한 건지 현대 의료 기술의 탓인지 시험관 아기를 성공해서 손녀딸을 품에 안았다. 산후조리를 핑계로 아버지 혼자 시골에 두고 엄마는 언니의 산후조리를 했다. 그것이 사달이었다. 혈압이 있어 약을 먹던 엄마였는데 어찌 된 일인지 저녁을 먹고 어지럽다 했다. “아야 어디서 타는 냄새가 나지 않냐?”하며 말과 행동이 느려지더니 스르르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였다. 급하게 응급실을 찾았지만 작은 병원에는 인턴 당직밖에 없었다. 응급조치가 늦어졌다. 병원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의식이 있던 엄마는 어찌 된 건지 병원에서 차츰 의식을 잃었고 다시는 눈을 뜨지 못했다.

일주일 동안 지옥을 넘나들었다. 눈물도 말라 버릴 때쯤 아버지가 시골에서 올라왔다. 끝이 보인 것이다. “너희 엄마 다 되어 부렀냐?” 하던 아버지의 떨리는 목소리를 잊을 수가 없다.


아버지에게서 엄마를 빼앗아 버린 것 같은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자식의 산후조리를 위해 서울에서 한 달 이상을 머물렀다. 시골 살던 사람이 도시에서 한 달을 지내는 게 쉬운가. 엄마의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차마 내색도 못하고 갓난아이 씻기고 내내 밤잠을 못 잤을 것이다. 혈압 약을 잘 챙겨 먹고 있는지 자주 확인 하지 못했다. 살아서가 아닌 눈을 영영 감고서야 편한 내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를 용서하지 말라고 말했다. 불효의 죗값을 평생 치르며 살겠노라고 울부짖었던 것 같다. 엄마가 선산으로 가던 날 햇빛에 반사된 눈 때문이었는지, 퉁퉁 부은 눈이 떠지지 않아서였는지 사방 천지에 흰 눈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도 하얀 백지만 생각이 난다. 흰 도화지 한 장이 그날 보고 겪은 모든 것이었다. 겨우 스물네 살이었다.


엄마보다도 나이가 많았던 동네 어르신들이 그 후로도 수년 동안 건강하게 살아계시는 것을 볼 때마다 왜 엄마는 그렇게 빨리 가버렸을까?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식 탓을 할 수도 없는 아버지는 기껏 “너무 오래 있었어.... 허 참”이라는 말로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꾹꾹 눌러 삼킬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서 너무 고생을 많이 했다는 뜻일 게다. 젊은 날엔 아버지의 술로 고통을 받았고 늙어서는 병든 육신으로 고달팠던 엄마를 아버지는 오래도록 미안해하고, 오랫동안 그리워하며 눈가를 적셨다.


후년이면 내 나이가 엄마 돌아가신 나이가 된다. 아이들은 엄마를 잃은 나의 스물네 살보다 많은 나이다. 건강에 신경이 쓰인다. 내 아이들이 슬픔을 감당할 나이가 될 때까지 오래 곁에 있고 싶다. 뜻대로만 된다면 말이다.

“딸아 엄마 마라톤에 도전해 볼까 해”

“ 좋다 엄마 파이팅”

“너 안 믿는구나!”

“걷기부터 하세요. 관절 절단 납니다.” 말은 그리 하면서 “마라톤 같이 해볼까?”라고 말해주는 딸에게서 사랑이 느껴진다.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