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오빠가 서울로 학교를 옮겼다. 나이차이가 있던 언니와 몸이 약해 조용하기만 했던 오빠가 집을 떠나 서울로 갔을 땐 그런가 보다 했다. 동생은 달랐다. 동생마저 서울로 학교를 옮겼을 땐 알 수 없는 우울감에 빠졌다. 하루아침에 혼자 남았다. 나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나 따위의 의견은 처음부터 안중에도 없었다. 가슴이 꽉 막힌 듯 미칠 것 같았다. 왜 아무도 물어봐주지 않는 걸까? 너는 괜찮은 건지.... 너는 혼자여도 아무렇지 않은지.... 일곱 살 적 아버지가 초코파이상자를 내게 안겨주었을 때 느꼈던 자존감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엄마 나도 갈래. 서울로 학교 보내줘"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싶었다. "아버지 왜 나만 서울로 학교 안 가?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말을 애써 삼켰다. 매일 왁자지껄 하던 집안이 갑자기 조용했다. 아침마다 화장실 앞에서 빨리 나오라고 소리 지르던 일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매일 싸우고 매일 혼나던 일상. 서로의 잘잘못을 일러바치느라 침을 튀기던 날들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바뀌어 버린 상황을 원한적이 없었다. 다들 멋대로 정하고 멋대로 떠나버렸다. 할머니가 하신 유일한 한마디 "다 가면 어떡헌다냐 빛나라도 여 있어야지" 그렇게 나만 시골에 남았다.
형편이 넉넉한 것도 아닌데 종갓집의 19대 장손을 잘 키워보겠다는 엄마의 간절함이 오빠를 서울로 유학 보냈다. 동생은 왜? 설마 남자라서? 나는 가야 할 이유가 없었다. 꽤 오랫동안 힘들었다. 다투기만 하던 동생도, 알아 들 을수 없는 가곡만을 부르던 언니도 매일 생각났다. 나만 버림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만한 엄마에게만 화풀이를 해댔다.
여섯에게 나눠주던 사랑을 혼자 받는 느낌이 나쁘지만은 않을 때도 있었다. 아버지가 좋아하던 닭백숙을 예전 같으면 한두 점 얻어먹었겠지만 혼자가 되니 닭다리는 물론 살코기까지 푸짐하게 먹어서 좋을 때도 있었다. 엄마는 더 이상 잔소리도 없이 살갑게 대해준다. 아버지는 장날이면 통닭을 사다 주셨다. 그러나 때때로 밀려오는 외로움을 견디기 힘들었다. 동생과 아무 말 대잔치 하며 싸우던 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알 수 없는 답답함에 치밀어 오는 분노를 느꼈다. 성인이 되어 형제가 있는 서울로 올 때까지 지독한 외로움과 그리움으로 점철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시나브로 혼자라는 것이 편해질 때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내게 남다른 적응력이 있다면 그때 길러졌을 것이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달라질 게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 살아남기 위해 길들여진다. 그런 시간들은 사람을 단단하게도 해준다. 부모가 대신해 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친구처럼 말이 잘 통하지도 않는다. 화가 나면 동생하고 하듯이 막말하며 스트레스를 풀 수도 없다. 혼자 생각하고, 혼자 해결하는 일들이 많아졌다. 말 수도 줄고 어찌 보면 진짜 철이 든 것이다. 많이도 원망했던 엄마, 아버지의 선택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서울로 학교를 옮기지 않은 것을 무척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엄마는 자식여섯중에 다섯을 서울로 보낸 뒤 겨우 십 년 을 우리 곁에 머물다 떠났기 때문이다.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막내가 가장 많이 서러워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내가 살아온 세월 중에 엄마랑 살았던 세월은 13년이 다였어" 목놓아 울던 막내였다. 서울 학교를 포기한 대신에 엄마옆에 가장 오래 있었단 사람은 나였다. 학교를 옮겼더라면 엄마와 보낸 시간은 훨씬 짧았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