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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빛나 Nov 10. 2024

7. 가을 단상

도서관보다 공원

도서관에 가려고 나섰다. 책 두 권과 노트북을 챙겼다. 딸 유이도 함께였다. 집에 있을 땐 몰랐는데 나와보니 햇살이 어찌나 따스하던지 몸이 나른 해지고, 마음이 녹아내린다.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히고 어지럼증이 날 때까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금방이라도 쪽빛 물감이 뚝뚝 떨어질 것 만 같은 짙푸름이다.


집에서 도서관에 가는 길은 작은 다리를 건너 큰 도로변의 신호등을 지나 오르막길을 얼마 동안 씩씩 거리며 걸어야 한다. 신호를 기다리며 큰길에 섰다. 황금색 은행나무 뒤에서 햇살이 속삭인다. "오늘은 도서관보다는 공원에서 나랑 놀아!"


무거운 노트북이 들어있는 가방을 메고 도서관이 아닌 공원으로 향했다. "유이야! 햇살이 좋다. 공원으로 가자!" 본래 계획은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쓴 에 공원을 갈 생각이었으나, 순서를 바꾸기로 했다. 도서관에서 나올 때쯤이면 해는 이미 사라지고 어둑해질 테니까.


깊어진 가을 정취를 나만 느끼고 싶은 건 아닌가 보다. 나들이 나온 가족들로 공원은 활기가 가득하다. 그네 타는 쌍둥이 동생을 밀어주는 누나의 웃는 모습이 예쁘다. 삼대가 둘러앉은 돗자리에선 꿀 떨어지는 눈으로 할머니가 손주를 보고 있다. 책을 읽는 아빠 옆에서 서너 살쯤 되어 아이는 딸은 색연필을 들고 뭔가에 열중이다. 요정 캐릭터 하츄핑이다. 살랑살랑 엉덩이를 흔들며 지나가는 흰 몰티즈 강아지조차 기쁨에 충만해 보인다.


여기저기 축제와 행사를 알리는 현수막도 보인다. 조용한 것보다 소란스러운 가을이 좋다. 살아서 펄떡거리는 기분이다. 가오리연 하나가 바람을 타고 하늘 높이 올라간다. 연은 바람에 몸을 맡기고 유유자적하게 날아간다. 언젠가 우연히 스치듯 만난 문장 하나가 떠오른다.


"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


누구의 글이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마음만 먹으면  알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어 감사하다. 휴대전화 초록 창에 문장을 넣었다. 프랑스의 시인이자 사상가인 폴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에 나오는 구절이다. 공책에 적어두었던 것 같은데 첫 구절만 생각이 난 것이다.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

광활한 대지가 내 책을 펼쳤다가 덮고 파도가 바위에서 솟구치며 산산이 부서진다! 날아가라. 나의 현혹된 페이지들이여! 부수어라, 파도여! 흥겨운 물살로 부수어라 돛배들이 모이를 쪼고 있던 저 평온한 지붕을!


가끔은 기분과 상반된 감정으로 차분해지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좀처럼 자리가 나지 않는 벤치 옆을 서성이다 겨우 한자리 얻었다. 가져간 책을 펼쳤다. 눈 아래의 글자보다 자꾸만 위의 하늘에 눈이 간다. 철새 한 마리가 푸른 하늘을 유영하듯 날아간다. 새의 날갯짓이 나긋나긋하다. 급할 게 없나 보다. 나에게도 말했다.

"너도 급할 게 없는 사람이란다!"


책을 덮고 작은 연못 옆을 걸었다. 하늘이 물속에도 있다. 줄 따라 핀 노란 국화향이 진하게 풍긴다. 갈색 수초가 꽉 찬 연못 위로 누가 떨어트렸는지 과자가 떠있다. 물고기는 보이지 않지만 배고픈 물고기에게 과자를 주고 싶었나 보다. 딸 유이와 손깍지를 하고 맴을 돌듯 연못 주변을 걷고 또 걸었다.


해가 짧다. 벌써 하루가 가다니! 저녁에는 온 가족이 둘러앉아 다 함께 밥을 먹어야겠다. 엄마에게 해줄 이야기가 있을지도 모른다. 아내에게 하소연할 사연 생겼을지도. 지지고 볶는 얘기를 들어보고 싶다. 도서관 대신 삼겹살을 사들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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