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이 료코 <서랍 속 테라리움>
처음으로 소개할 만화는 <던전밥> 으로 익히 알려져있는 쿠이 료코 작가님의 (초)단편집 <서랍 속 테라리움> 입니다. 단편인데도 단편작 각각의 인물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표지가 재밌어요. 책을 펼치기 전부터 만화를 읽는 느낌이라 재밌었습니다. 어떤 내용일지 생각하는 재미도 있고요. 원래 구판을 가지고 있었는데 여러 특전의 유혹으로 인해 신장판도 구매했다는 뒷이야기도 살짝 적어봅니다. 1권의 책 안에 33편의 단편이 담겨 있습니다. 던전밥을 보신 분들이라면 이 책을 읽고 작가님 취향 소나무시구나 싶을 정도로 던전밥이 떠오르는 요소들이 단편 각각에 담겨있습니다. 저는 단편을 먼저 읽고 던전밥을 접했던터라 이렇게 발전시키셨구나 생각했는데 역으로 던전밥 먼저 보신분이 이 단편을 보신다면 무슨 생각을 하실까 궁금해지네요.
쿠이 료코 작가님의 정발된 책은 모두 소장중입니다. 작가님의 단편집을 자주 꺼내 읽는 편인데 읽다 보면 좋은 의미로 작가님이 사람한테 별로 관심이 없구나 싶은 부분이 있어요. 그런 지점이 저와 비슷한 부분이 많아 괜히 더 가깝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쿠이 료코 작가님의 매력 중 하나가 이 무관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에게 과하게 관심을 갖는 사회 분위기가 가끔은 피곤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한 번씩 더 펼쳐보곤 하네요. <서랍 속 테라리움> 안에서 특히 좋아하는 단편들 속 좋아하는 대사를 찍어봤습니다. 표제작인 서랍 속 테라리움은 사진을 찍으면 스포가 되는지라 올리지 못하는 게 아쉽네요.
<서랍 속 테라리움> 에서 가져온 키워드
초단편
환승
안심감
아래부터는 <서랍 속 테라리움> 에서 가져온 3가지 키워드로 제가 창작한 단편 소설이 이어집니다.
눈과 걸음의 상관관계
눈이 내린 자리. 어린 나는 도시의 회색빛을 모두 백지로 돌리는 눈을 사랑했습니다. 그 무의 색이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의 발자국과 호흡으로 변해가는 순간을 보며 사랑은 곧 동정으로 바뀌었습니다.
이곳에 발을 디디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어린 나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포슬거리던 눈은 아스팔트 바닥에 끈적하게 녹아 사람들의 발자국을 찍는 인주와 비슷한 모양이 되어 있다.
사영은 더럽게 뭉쳐진 눈을 잠시 바라보다 지하철로 이어지는 계단을 조심스럽게 걸어 내려갔다. 후끈한 열기와 함께 익숙한 소음이 들린다. 슉슉 패딩이 부딪치는 소리와 저벅저벅 걸어가는 사람들의 발소리 삑삑 일정하게 찍히는 교통카드. 희미하게 느껴지던 겨울 냄새는 이미 지하철의 열기와 사람들의 냄새로 지워진 지 오래였다.
사영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취업에 성공했다. 성공했다는 주변 지인들의 감상으로 사영은 자신이 정말 성공했다는 느낌은 없었다. 적당한 성격 적당한 성적 적당히 맞춰간 대학과 살아온 적당함을 모두 나열한 적당한 이력서로 적당한 회사에 취직했다.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 사이를 적당하게 타협해 고른 직장.
적당한 월급에 적당한 작업량 그리고 적당히 서로를 맞춰줄 수 있는 동료들. 사영은 첫 직장치고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단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지하철을 한 번 갈아타야 한다는 정도일까.
사람들이 빠듯하게 들어찬 지하철은 종점인 수영역 문이 열리면 언제 그 많은 사람이 타고 있었나 싶을 정도로 텅 비어버린다. 사영은 그 광경이 언제나 눈에 밟혔다. 쏟아지는 사람들은 발 맞춰 계단을 오른다.
저벅저벅 쓱쓱 또각또각 쿵쿵
훅 끼치는 열기에 목뒤 쪽에는 약간 열이 오를 정도인데도 왜 이렇게 차갑게 느껴지는 걸까. 사영은 오늘도 역시 환승 지하철까지 가는 계단을 바로 오르지 못한다. 그저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의 걸음을 눈으로 쫓을 뿐.
'이 많은 사람들은 사실 모두 죽으러 가는 게 아닐까'
사영이 다니던 입시학원은 유명한 곳으로 (엄마가 그랬기에 정확한 것인지는 모른다) 엄마의 성화로 지하철을 타면서까지 학원에 다녀야 했는데 그때도 지금처럼 환승을 해야했다. 학교는 집과 가까워 지하철을 탈 일이 없었기에 나는 처음으로 본 이 광경이 왠지 무섭게 느껴졌다. 표정 없는 사람들은 일제히 한 곳을 향해가고 그런데 그 공기가 무척 차가워 사영은 무의식적으로 이 사람들이 모두 죽으러 가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판타지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저승으로 가는 지하철이랄까. 지금에서는 그땐 참 엉뚱하고 예의 없었구나 싶지만 어린 사영은 당시에 꽤 충격을 받았고 한동안 사람들이 모두 올라가기 전까지는 환승 계단을 오를 수 없었다. 멈춰있는 지금도 마찬가지인가 싶지만.
사영은 취직 후 돈을 벌게 되면서 알았다. 사람들은 환승 계단을 죽기 위해 오른 게 아니라 살기 위해 오른다는 사실을. 힘없게 느껴졌던 발걸음은 매일 쥐어짜 내 내딛는 걸음이었단 것을.
장산역으로 가는 열차에 탑승해 문 쪽 손잡이에 기댄 사영은 눈을 감았다. 대학 입학 이후 연락하지 않는 친구의 말을 되새긴다. 이 일이 최근 사영이 무언갈 하기에는 애매한 도착 시간을 죽이는 방법이었다.
"나는 20살까지만 살 거야"
그럼 2년 뒤에 죽어야겠네. 사영은 높낮이 없는 무미건조한 어투로 답했다. 그 애는 친구가 2년 뒤면 죽는다는데 그게 다냐는 식으로 말하며 주먹으로 응징했고 그 말은 그렇게 흩어졌었다.
흩어졌었다고 생각했는데 내 안에 남아있었구나.
사영은 그때와 같은 무미건조한 어투로 스스로에게 답했다. 그 애는 지금 어떻게 지낼까? 시간을 죽이기 위해 쥐어짜 낸 생각 안에서야 가장 친했던 친구의 안부를 궁금해하는 스스로가 웃겨 사영은 마스크로 너머로 자신도 모른 채 어이없단 듯이 약간 입꼬리를 올렸다.
이번 역은 장산- 장산역입니다-
문이 열리기도 전에 사람들이 분주히 일어나 갈 채비를 한다. 그 사람들 더미에는 사영도 있었다.
'그 애도 여기 사이에 있을까?'
문득 사영은 그런 생각을 해보지만 열린 문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과 내리기도 전에 탑승하려는 사람들 사이를 피해 걸음을 딛는 동안 그 생각은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사람들이 분주히 계단을 오른다. 잠시 멈칫한 사영은 이내 발걸음을 내딛는다. 신기하게도 이곳의 공기가 전만큼 차갑게만 느껴지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