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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조음 Sep 03. 2024

트롯가수 김양 마주하다

 흐르는 강물처럼


토요일 저녁, 낭산에 있는 심곡사로 향했다. 약속이 취소되어 포기했었는데, 당일 집으로 가는 도중 긴급하게 일정이 잡혔다.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사찰이라 궁금했는데  마침 산사음악회가 열린다고 해서 바삐 움직였다. 차 안에서 소금빵 한 개로 저녁을 대신하며 동행했다.


시간이 나면 본능적으로 물을 찾아가는 사람이다. 사주에 물이 없기도 하거니와 어릴 적 저수지의 강물을 보고 자란 탓에 물이 없는 곳에서는 심한 갈증을 느낀다. 순전히 물을 바라보며 살고 싶어서 한 시간 거리에 집을 두고 출퇴근을 자처한다. 푸른 산과 들판에 익숙하다 보니 넘실거리는 바다를 더 동경하는지도 모른다.

구불한 들길을  따라 승용차 한 대 정도만 겨우 오를 수 있는 곳에 심곡사가 있었다. 어스름에 도착해서 보니 저 멀리 커다란 절벽보일 이다.


떡목&김양

떡목? 떡이 목에 걸렸다는 말인가?

검색해 보니 판소리창법에서 텁텁하고 얼어붙어서 별로 묘한 조화를 지 못하는 목소리,라고 나와있다.

쉬운 말로 해석하면  떡이 목에 걸린 것처럼 고음을 내지 못하는 눌린 소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목청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소리꾼이 될 수 없을 텐데, 떡목을 극복하여 소리꾼으로 거듭 난  분이 바로, '정정렬'명창이시다. 순전히 그분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작은 산사 음악회올해로 13회째라 하니 심곡사에서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행사를 벌이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솔직히 음악회에 출연하는 가수들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절을 찾아온 것뿐이라서 작은 공연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함성소리와 가수들의 열창에 구경이나 할까 싶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름을 알듯 모를 듯, 트로트 경연에서 인기를 얻은 김양이 무대에 올랐다. 심곡사 초청 대표 가수는 그녀였다.


김양? 김양?


무대에 설치된 화면에 그녀의 얼굴이 크게 확대되었다. 어디서 봤더라? 순간 작은 기억이 뇌리에 스쳤다. 거의 17년 전일이다.


산사에 오래 묵어 지내다 보니 많은 인연들을 만났다. 내로라하는 톱스타들이 영화 촬영차 들르기도 해서 같이 기념 촬영도 많이 했다. 김양 또한 그런 인연 중에 한 사람인데 시쳇말로 떠서 유명해지니까 기억 속에서 튀어나와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이다. 평소 TV시청을  별로 하지 않는 내가 김양을 기억한다는 건 그만큼 떴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절간으로 김양을 데리고 온 사람은 명상음악, 찬불가 등을 제작한 음반기획자 대표님이셨다. 어릴 적 출가하여 스님 생활 하다가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환속하신 특이한 이력을 가지셨다. 어린 정서에 스며든 타고난 음악적 재능을 십 분 발휘하며  명상음악을 제작하여  불교색채를 표현하는 맑고 선한 분이시다. 지금까지도 그가 만든 명상음악이 사극이나 다큐 프로그램에 흐르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대표님께서 김양을 키우기로? 했다면서 갓 신인을 데리고 절간을 찾아온 것이다. .


 김양에 대한 첫 인상은 '이쁘다'는 말보다는 키가 크고  너무 말랐다는 기억뿐이다. 대표님은  그녀의 노래가 담긴 Tape와 Cd를 두고 갔다.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거듭하며  물러났다. 오죽이나 했으면 산골짝 절간에까지 데려와 인사를 시킬까, 진한 여운으로 남았다. 


김양은 작년 트로트 경연에서 상위를 차지하면서 기나긴 무명 생활에서 벗어날수있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장윤정과는 데뷔 동기로 알려져 있다. 똑같은 실력을 가졌어도 노래 한곡으로 뜨고 안 뜨고에 따라 가수의 운명이 갈린다.

'자고 났더니 유명해졌더라?'는 말은 ''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영광의 트로피 같은 문장이다. 무명에게는 언감생심 어림도 없는 말이다. 그녀는 동료이자 절친인 장윤정을 보며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내가 엄연히 쟤보다 노래를 훨씬 잘하는데, 왜 나는 못 뜨는 거지?

반발하고 우울해하면서 불우한 환경에 함몰되었다면 그녀는 영영 뜨지 못했을 것이다.

'나도 언젠가는 뜰 때가 있겠지, 그날이 꼭 올 거야!'

고치 속의 번데기처럼 웅크리면서 날개를 달게 될 날을 위해 세월을 견뎌냈겠지. 감히 메인 무대에 서지 못하고 스타가 올 때까지 땜빵으로 노래를 불렀을 테지. 방금 노래 부른 가수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건성으로 치는 박수를 받으며 초라하게 물러났을 테지.  

친구사이, 혹은 피를 나눈 형제 사이에서 기쁜 일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데는 한 번의 깊은 숨을 쉬고 내뱉어지는 것을 어른이 되면서 알았다.


 나도 솔직히 그녀가 이렇게 뜰 줄은 몰랐다. 그녀가 신인이었을 때도 이미 내로라하는 대형 가수들이 진을 치고 있어서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기엔 단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이제야 뜨게 된 것은 오직 그녀 실력뿐이다. 그녀가 믿을 것은 오직 자기 자신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길고 긴 무명의 세월, 그녀의 노래에 울림이 있는 것은 바로 인내하며 꾸준히 실력을 쌓아온 내공이 노래에 실려있기 때문이다. 늦게나마 관객들의 사랑을 받게 된 것 또한 그나마 하늘이 도왔다고나 할까?

실력을 갖추었음에도 뜨지 못하고 사라지는 별들이 무수히 많으며, 노래 실력과 무관하게 추문과 입방아에 올라 추락하는 별들을 많이 봐왔기에 그녀의 성공은 더더욱 의미가 깊다. 아마 그녀는 나를 전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 전세가 역전되었다. 내가 그녀에게 다가가 억지로 옛 인연을 더듬어 사인을 받아야 할 처지가 되었다.


이름을 알리고 노래 실력을 인정받은 덕분에 이번 산사 음악회에는 그녀가 메인무대에 섰다. 천여 명의 청중이  박수와 환호성을 지르며 격하게 반겨주었다.

'신곡 반응이 좋아서 이제 밥 좀 먹게 생겼다'

면서 너스레를 떨며 인사를 했다. 어딜 보나 완숙미와 프로의 기질이 엿보인다. 17년 전 얼굴 그대로이다. 첫인상이 너무 말랐다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몸매 관리를 잘한 듯 완벽하다. 의상과 무대매너도 멋지다.


 그녀가 노래를 부른다.

 주어진 이십 분이 그녀의 시간이다. 무명일 때에는 대기하다가도 중도에 다른 가수에 밀려 무대에 서지도 못한 채 내려오기를 반복했던 그녀가 당당히 특별 초대가수가 되어 열창을 한다. 이십 분 동안 관객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는 힘. 사람들은 오직 그녀만 바라보고 있다. 무대에 서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었을까? 연습, 연습, 또 연습... 그녀에게는 지금 그 누구도 보이지 않는다. 이어폰에 귀 기울이며 영혼을 담아 노래에만 열중하고 있다. 무대밖에서 쓰러질지언정 지금은 혼신을 다해 열창을 한다. 이 함성과 박수소리를 얼마나 그리워했을까? 얼마나 꿈을 꾸며 견뎌냈을까? 이어폰으로 들리는 간주가 끝나고나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일제히 그녀에게 열광하는 박수소리와 청중을 보았을 것이다.


처음 듣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우리나라에서 이미자선생님처럼  존경받는 일본의 유명가수 '미소라 히바리'님의 노래이다.

 '흐르는 강물처럼' 아름다운 선율이 산사에 흘러내린다. 이 노래를 심곡사에서, 그것도 김양의 노래로 들을 줄을 꿈에도 생각 못했다.


얼마나 왔을까

뒤돌아 서 보니

지나온 청춘이 보이네

기쁨과 슬픔에 만남과 이별에

울고 웃었던 인생길


굽어진 오솔길도 비탈진 언덕길도

걸음걸음마다 꿈을 꾸던 그대여

아아

말없이 흐르는 강물 속에

근심 걱정 미련 없이 훌훌 벗어던지고

아아

없이 돌고 도는 계절처럼

끊임없이 새롭게 피어나리

그대라는 꽃


울창한 숲에 가려 하늘마저 보이지 않는 깊은 산중에서 '흐르는 강물처럼'을 듣는다. 심곡사 계곡으로 푸른 강물이 떠내려온다. 소슬한 가을바람에 실려 강물이 흐른다. 울퉁한 바위와 산죽나무 사이를 지나 나뭇잎을 빙글 태우며 흘러간다. 흘러간 물은 농수로에 곡식을 익게 하고, 단내를 풍기는 과일을 만든다. 만물의 생명수가 되어 도도히 흐른다. 산에서 흐르는 강물이란...


정정렬 명창이 절대 소리꾼이 될 수 없는 치명적인 떡목으로도 대명창이 되었듯이 김양 또한 길고 긴 무명의 터널을 지나 이제야 빛을 발한다. 오래 묵은 나무에서 꽃이 핀다. 오래 묵은 만큼 크고 화려하고 향기가 짙다. 잘 부탁한다며 깍듯이 인사한던 십칠 년 전의 신인 가수, 김양이 절절한 목소리로 저 무대 위에서 찬란히 빛난다. 이곳에 노래하는 그녀와, 듣는 나, 단둘만 남은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노래에 빠져든다.

노래가 끝났다. 그녀가 숨을 고른다. 청중들이 일제히 일어나 '김양! 김양!'을 연호하며 함성을 지른다.

나도 벌떡 일어나 크게 소리를 지른다.


 "앙코르!!"


그녀가 그랬듯, 나도 무명의 긴 글을 쓰고 있다. 미래의 예언자가 있어 만약 나에게 김양처럼 스타로 만들어 줄 테니 17년 세월을 무명으로 견디고 있으라 한다면, 난 단박에 거절할 것이다.


'됐소! 그냥 뜨지 않겠소!'


강물은 그저  흘러가보라고 등을 떠민다. 김양처럼 뜰지 가라앉을지 알 수는 없지만 돌연, 바싹 물이 말라 사라질지언정, 흐르다 무엇을 싹 틔우고 꽃 피우게 할지는 아무도 모를 일 아닌가. 위안이 되고 기쁨이 되고 치유가 되는 그런 글을 쓰라고 말한다. 지금 김양이 부르는 저 노래처럼 말이다.


가을이 글을 쓰라 한다.

노래가 글을 쓰게 한다.

강물이 글을 쓰게 한다.

흘러가라 한다.


 이 가을날에,

 아름다운 날에...

https://youtu.be/W8ZcIErzuh4?si=eieB-JIV-QPHjCR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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