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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펜을 들기로 했다

by 눈물과 미소



텃밭에 일주일 만에 갔다. 챙겨간 아이스박스에서 음식을 꺼내어 정리하고, 보냉제를 꺼내어 냉동실에 넣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특유의 냉기는 온데간데없고 바닥에 물이 흥건한 것이었다. 알고 보니 전기가 나간 상태였고, 그동안 냉동실에 얼려뒀던 음식물이 모두 녹아내렸다. 언제 전기가 나갔는지 알 수 없기에 음식물은 가루류를 제외하고는 모두 버려야 했다. 분명, 전기가 나가고 얼마 동안은 냉기가 유지되었을 것이었다. 음식물도 전기가 공급되던 때와 비슷한 상태로 전혀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냉기가 빠지면서 얼었던 음식이 녹고, 서서히 부패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글쓰기가 이러할까 싶었다. 쓸 거리도 쓸 마음도 없어 하루하루 지나 보낸다. 처음에는 해방감과 주어진 시간에 기쁘기까지 하고, 글을 쓰는 삶이나 그렇지 않은 삶에 커다란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생각하는 능력과 쓰기 지구력이 점차 녹아 휘발되어, 더는 쓰기 어려워지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이야기할 수 없고, 더 근본적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사유 불능’의 상태로 점차 썩어지는 것이다. 여기에 생각이 이르자 아찔했다. 이야기할 능력이 없는 상태는 흡사 ‘마음의 불구’와 같은 모양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실은 펜을 들고 싶지 않은 마음이 한동안 이어졌다. 수업 연구를 주로 하는 블로그만 남겨두고 브런치 계정은 폐쇄할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첫째, 나의 글쓰기 역량에 심각한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고, 둘째, 무엇을 써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수면 습관이 불규칙해져서 초저녁마다 곯아떨어지는 통에 글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글쓰기에 대한 자신감이 점차 사라져만 갔다.


오늘은 큰맘 먹고 한글 문서를 열었다. 뭐든 이야기해 보려는 심산이었다. 물론 글쓰기가 쉬웠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오랜만에 쓰려니 생각은 더더욱 쉽게 글이 되지 않았다. 부부 관계가 오래 잘 지속되려면 긍정적인 것을 추구하기보다 부정적인 것을 피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대니얼 카너먼이 <생각에 관한 생각>에서 인용하였다. 오랫동안 글을 쓰려면, 글을 쓰지 않음으로써 생기는 자존감 저하를 피해야겠다. 생각하는 능력이 영영 썩어버리지 않도록 말이다. 그래서 가끔일지언정 ‘펜을 들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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