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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기다렸다가 문을 열어야 하나요

by 눈물과 미소




흥미로운 신문 기사를 한 편 읽었다. 이웃에서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오면 바로 문을 열지 말고 좀 기다려서 이웃이 먼저 나가거나 들어간 후에 문을 여는 ‘센스’를 발휘해 달라는 쪽지를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곰곰 생각해 보면 나도 되도록 이웃과의 접촉을 피하기 위해 인기척이 없어진 후에야 문을 열곤 한다. 그러나 이것은 타인을 배려하는 센스가 있어서라기보다 그저 내가 누군가를 마주치기를 내심 꺼려하는 마음의 발로이다. 큰소리로 자녀를 혼내는 것을 이웃이 들었을까 봐 민망한 마음, 혹은 잠옷차림이거나 맨얼굴로 누군가를 만나는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마음인 것이다.


그러나 신문 기사에서 소개된 쪽지를 쓴 이는 마주치지 않도록 ‘배려’해 달라고 부탁함으로써 이웃과의 마주침, 아니 ‘이웃에 대한 회피’를 ‘예의범절’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초개인화 되어가고 있는가를 방증한다. 사회 전반에 걸쳐 공동체의 개념이 점차 없어지고 개인이 강조되고 있는 실상이 이러한 현상에 드러나는 것이다.


하기사 쪽지를 쓴 이를 비판하기 전에, 나 자신부터 돌아보게 된다. 최근 이사 오신 앞집 아주머니께서 차 한 잔 하자고 제안하신 것에 대해 ‘예’라고 대답을 해놓고 시일이 제법 지난 지금까지 이에 대해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은 내가 아니던가 말이다. 집을 치우지 못했다는 핑계와, 이러저러한 일로 바쁘다는 핑계와,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마음이 한데 버무려진 결과이다.


‘집을 좀 깨끗하게 해놓고 초대해 드릴게요.’라는 말이 공염불이 되어버리지 않도록 하고 나름의 ‘우리’를 회복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궁극적으로는 이웃의 초청에 응하여 차를 한 잔 함께 하며 교제하는 일이다. 하지만 이를 위해 집 청소도 해야 하고, 무엇보다 사람을 만나기 위한 용기를 지녀야만 한다. 적어도 ‘아직까지 초대해 드리지 못해 죄송해요.’라는 말과 함께 내일과 모레에 걸쳐 수확할 땅콩을 건네면서 말을 걸어 보아야겠다. 거창하게 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이웃 사랑을 실천한다기보다, 나의 삶에 아주 작은 ‘우리’가 회복되면 좋겠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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